[정치닷컴=심은영 편집기자 ▲김윤옥 숨&쉼 소장기고]
막내이모가 일흔을 만나지 못했다. 벚꽃이 피기 전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딸 셋 중에 가장 예뻤던 여인. 그런지라 콧대가 하늘을 찔렀다. 내로라하는 남자가 줄을 이을 정도로 대단했는데 하나 같이 고배를 마셨다. 그렇더라도 선수는 등장하는 법. 질긴 구애 없이도 눈을 내리깔게 만드는 남자가 나타났다. 호황기를 맞은 섬유산업의 주역이자 인물 좋은 젊은 사업가가 턱을 치켜들고 손을 내밀었던 것. 도저히 거절할 재간이 없었고, 결혼은 속전속결 진행되었다. 때는 60년대. 대부분 가난했지만 예식은 요즈음 못잖게 화려했다.
폼 나게 잘 살 줄 알았던 막내이모의 연극은 시작과 달리 애달파졌다. 행복한 1막에 이어 기대치 않은 불행한 2막이 기다리고 있었다. 결혼하고 몇 년 지나지 않아 공장은 삐걱거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기까지 당했다. 급기야 부도를 맞았고, 결국 문을 닫았다. 젊은 나이에 백수가 된 막내이모부. 남 탓, 세상 탓 만하며 술로 세월을 보냈다. 그 씨름에 이길 장사 없단 말을 증명이나 하듯 간경화로 일찍 세상을 떴다.
서른이 조금 넘은 나이에 혼자가 된 막내이모에게 남은 건 찢어지는 가난과 거둬야할 7남매뿐이었다. 나중에 비밀처럼 들은 얘기지만 가까운 친척들도 모르게 낳았던 갓난쟁이 딸 쌍둥이는 감당키 어려운 생활고에 몰리면서 눈물을 머금고 남의 가정으로 보냈다. 당시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상실의 아픔과 가난의 멸시를 잊으려는 듯 막내이모는 독하게 살았다. 비바람 속에 온갖 장사를 하며 악착같이 돈을 벌었다. 남편 몫까지 하면서 자식들을 남부럽지 않게 길러냈다. 차례로 짝지어 보내고서는 이런 저런 시름에 놓여나는가 싶었는데, 신은 편안하게 쉴 여정을 허락하지 않았다. 마지막 젖을 물리고 피눈물을 흘리며 딸들과 생이별을 해야 했던 아픔이 소나무 옹이와 같은 생채기로 남았던 걸까. 삶은 다시 돌부리에 채였다. 노년을 앞두고 숨지는 순간까지 유방암과 재발, 전이로 이어지는 가혹한 고통을 받았다.
가족을 찾는 TV프로그램이 방영되면 엉덩이를 텔레비전 앞으로 바짝 당기곤 했던 막내이모. 그녀의 슬픈 그리움은 이제 끝났다. 안타깝게도 막내이모와는 다른 경우지만 가족을 지천에 두고도 매일 같이 마주하지 못하는 이들을 한 주에 네댓 번은 보게 된다. 병원에서 암과 투병 중인 분들과 명상을 통해 만나게 되면서 그들의 가여운 상실을 더러더러 목격한다.
암은 발병상황에 따라 차이가 나지만 장기 투병으로 이어지면 직장은 물론 사람과 삶의 방향까지 잃게 한다. 가장 먼저 언제까지나 손에 쥘 것 같던 일을 그만두게 만든다. 하고 싶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으니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다음은 사람이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곁에 있던 가까운 사람들과 멀어진다. 너무나 사랑해서 떠나보내기도 하고, 아픈 모습을 보이기 싫어 떠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이유로 관계들이 틀어진다. 물론 더욱 돈독해지는 경우도 있다. 분명한 것은 건강할 때와 사뭇 달라진다는 점이다. 건강을 되찾는 일이 지표가 되면서 원래 가졌던 삶의 목적이 불투명해진다.
입술을 깨물며 견뎌내야 할 통증이 기본인 투병의 실상은 같은 입장이 되어 보지 않으면 감히 알 수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이라는 단어 그 이상으로 많이, 많이 아프기 때문이다. 이해라는 단어조차 쓰기 민망할 만큼 그들은 혼돈에 놓인 심신의 아픔과 힘겹게 싸운다.
지난해 12월 발표된 우리나라 2016년 국가암등록통계에 따르면 암 유병자는 총 174만명으로 조사됐다. 2016년 새로 발생한 암환자 수는 22만9천180명으로 집계됐다. 남자가 12만68명, 여자가 10만9천112명이다. 전년도 21만6천542명에 비해 1만2천638명이 늘어났다. 남녀 전체 암 발생 1위를 보면 2015년과 마찬가지로 위암이었다. 대장암, 갑상선암, 폐암, 유방암, 간암, 전립선암이 그 다음을 이었다. 남녀 구분 암 발생 1위를 보면 남자는 위암, 여자는 유방암이었다. 유방암은 99년 이후 계속 증가추세다.
3명 중 1명꼴로 발생한다는 암. 그러하기에 국민 누구도 안심할 수 없는 현실이 됐다. 많은 암 전문 학자들은 암 발생 원인을 여러 측면으로 보고 있다. 유전적 요인, 환경적 요인, 면역학적 요인 등 복합적으로 일어난다는 게 통설이다. 여기에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빼놓을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경우 암 유발 인자에 노출될 위험이 크고 정상적인 세포기능을 약화시켜 암 발생 감시 체계가 무너지기 쉽다고 한다. 이런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면 좋으련만 생존 경쟁에서 자신을 지탱해야 하는 인간으로서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스트레스는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겪는다. 강도는 자궁 안 환경에 따라 저마다 다르다. 잘 견뎌낸 후 만나는 바깥세상은 더하다. 어둠 속에서 느끼지 못한 눈부신 빛, 직접적으로 꽂히는 다양한 소리들, 살갗에 닿는 생경한 감촉까지 모두 감당해야하는 대항거리다.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 웃지 못하고 악다구니 치며 우는 이유가 이 때문일까.
시간이 흘러도 별반 달라질 것은 없다. 긴장은 유아기를 거쳐서 어린이가 되고 청소년을 지나 어른이 되어서도 끊이지 않는다. 죽음에 이를 때까지 스트레스에 끌려 다니며 몸부림칠 것, 기정사실이다.
우리 몸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빠르게 반응한다.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 나겠지만 대체로 근육이 경직되고 심장 수축운동이 빨라진다. 아울러 호흡이 가빠지면서 안정과 멀어진다. 만성이 되면 몸과 마음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심리적으로는 우울, 불안, 초조, 긴장, 두려움, 분노 등의 증상들이 나타난다. 신체적으로는 잠 못 이루는 밤이 계속되고 속이 편치 못해 애를 먹는다. 설사와 변비, 식도염으로 고생하고 생리문제와 성적이상 기류도 흐른다. 저산소증이나 심혈관질환, 뇌혈관질환에도 노출되기 쉽다. 비만과 당뇨, 피부 트러블과 가려움증 위험 또한 배재키 어렵다. 게다가 감기도 자주 걸린다.
아드레날린이나 노르아드레날린, 코르티솔 등 스트레스 대처 호르몬들이 나서는데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 문제는 도를 넘기 때문이다. 극도로 치달리면 사력을 다한 이들 호르몬은 약이 아닌 독이 된다. 새로운 단계로 올라서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성장을 이끌고 성취감을 맛보게 하는 좋은 스트레스와 지신의 한계에 넘어서는 지나친 집착으로 몸과 마음이 피폐하게 만드는 나쁜 스트레스. 야누스처럼 두 얼굴이다.
나도 오랜 밥벌이를 하면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고 목에 결절을 주렁주렁 매달 만큼 정도가 심했다. 몸과 마음이 시궁창에 빠져 허우적대던 그때, 세상을 향한 눈이 보이지 않으니 정녕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중년이 되도록 달렸던 일상은 오직 일, 다른 사람, 가족을 위한 삶이었다. 놀랍게도 그 속에 나는 없었다. 마음과 몸이 피폐해지고 나서 살펴보니 진정 나를 위해 해준 것들이, 나를 위해 가진 시간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거슬러 샅샅이 뒤져보아도 결과는 같았다. 무에 그리 바빴던지 자신을 살필 시간조차 없이, 멈춰선 적 없이 살았다는 것을 절감했다. 잃어 봐야, 제대로 잃어 봐야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는 말이 사무치게 와 닿았다. 그야말로 나는 지나친 스트레스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심각성을 깨달은 이후 나를 무겁게 짓누르던 것들을 내려놓기 위해 고민했다. 쉽지 않았다. 오래도록 같이 했기에 더욱 그랬다. 그 중에서도 긴 세월동안 직장에서 켜켜이 쌓아온, 옷처럼 입고 있었던 역할을 벗는 게 가장 어려웠다. 의식주를 해결하는 중심인 데다 많은 사람들과 이어온 소통 채널이었기 때문이다. 장기간 배인 습(習)이기도 했고. 고민을 거듭하다 결단을 내렸다. 걸림돌이 적지 않았으나 소중한 것이 과연 무엇인지 알았기에 철없던 자아를 끊는데 성공했다.
역할을 벗으니 큰 짐 하나가 몸에서 확 떨어져 나간 느낌이었다. 마치 날개가 달린 것처럼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그때부터 따뜻한 시선을 나에게 돌리며 쓰러진 마음을 돌보려고 애썼다. 돌이켜 보면 아찔하다. 당시 그리하지 않았다면 지금 어찌 되었을까. 아마도 곤궁한 입장에 놓여있지 않을까 싶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일찍 멈추어 나를 바라보게 되어서 참으로 다행스럽다.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다양한 방법으로 푼다. 술을 마시기도 하고 담배를 피우기도 한다. 대화로 풀기도 하고 춤을 추거나 운동으로 푸는 이도 있다.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고, 잠을 자면서 이기기도 한다. 먹고 싶은 음식을 먹기도 하고 빈둥거리며 방바닥과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도 있다. 여기에서 술과 담배, 과식은 자칫 건강을 해칠 수도 있으니 추천에서 제외시키고 나머지는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행해도 될 듯하다.
나는 해결책으로 명상을 택했다. 우선 내재된 눈으로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닌,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의 내 마음을 살피게 되어 좋았다. 스트레스 받는 원인을 들여다보고 그게 무엇인지 알게 된 뒤에는 가능한 범위에서 원인을 줄이게 되었다. 알아차리고 머물며 지켜보는 쉼을 통해 힘겨움을 줄이니 자연 심신의 안정도 되찾았다.
명상은 정좌명상과 같이 고요한 가운데 살피고 집중하고 통찰하는 정적인 명상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걷고 춤추면서 움직이는 가운데 같은 상태를 경험할 수 있는 동적인 명상도 있다. 이 둘을 적절히 취하면서 나는 그동안 알지 못했던 현재에 처한 마음과 몸을 선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듣지 못했던 소리를, 느끼지 못했던 감각을, 얽혀 있던 신경의 호소를.
마음이 아프면 몸이, 몸이 아프면 마음이 아프다는 것을 깊이 체득하고 나서 몸속에 사는 마음을, 마음을 안고 사는 몸을 돌보는 도구로 명상을 활용한 건 너무나 잘 한 일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조용히 치유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아픈 내가 아픈 나에게 보낸 격려와 위로, 진한 관심이 결국 지친 나를 살리는 소중한 열쇠가 되었다.
꾸중하지 말아라
맘에 들지 않는다고
몰아붙이지 말아라
손가락질 하면서
비난하고
학대하며
쪼아대면
너만 아프지 않겠느냐
못나도 허용하고
실수도 받아들여라
쥐어 잡은 손
느슨하게 풀고
가시에 찔린
보석, 너를 위해
빙긋
빙긋이 웃어주어라
마음이 아프면 몸이 신호를 보내고 몸이 아프면 마음이 신호를 보낸다. 소중한, 가치 있는 존재들이여! 자신을 죽이는 시간이 아닌 살리기 위한 시간을 많이 아주 많이 가지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