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닷컴=조종건]
III. 한국교회의 잘못된 권위주의 극복해야
사회현장을 들여다 볼 때 한국교회가 사회의 적폐냐는 질문은 던질 만하다. 왜냐하면 한국교회가 예수의 정신을 실천하느냐에 대해서 회의감이 들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영향력 있는 목회자들은 물론 작은 교회 목회자들조차 사회영역에서는 성서의 궤도를 이탈해 있다. 3회에 걸친 글에서 지적한 것처럼 교회리더들은 사회문제에 대해 각색된 성서 해석을 적용하고 있다. 만일 이것이 사실과 다르다면, 사회의 근본 뿌리인 정의(justice)가 흔들이고, 거짓말이 난무하고, 약탈사회의 고위험에 대해 직시하지 않고, 안보 선동의 중심에 교회리더들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또 “사람은 ‘그것’ 없이는 살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사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마틴 부버의 통찰력은 ‘소유’ 없이는 살지 못한다. 그러나 ‘소유’만 가지고 사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는 시각에서 한국사회가 인간의 삶을 외면하고 개•돼지처럼 소유만을 지향하는 성장주의, 규모의 경제, 돈이 주인인 자본주의를 맹종하는 공범이 한국교회가 아니라는 것에 대해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 예수처럼 사회 현장에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구체성 있는 실천이 과연 한국교회에 있는가.
성서의 궤도를 이탈한 또 다른 현상은 잘못된 권위주의다. 목사는 기능직임에도 불구하고 신분 직으로 오해하고 있다. 박사과정 때, 다섯 살 아래인 어느 합동측 목사가 평소 대화에서 반말하는 것을 보고 교양 없는 목사라고 생각했지만 목회자는 평신도와 신분상 다르다는 잘못된 권위주의를 갖고 있다.
마치 이것은 1960년대 집주인 아들이 머슴보다 스무 살 아래임에도 불구하고 반말이 가능한 신분제처럼 생각하는 잘못된 권위주의 혹은 사제주의와 유사하다. 양희송은 ‘목사직은 세속 직업과는 다른 성직’이란 해묵은 이원론은 민망한 표현이라고 했고, 신약(베드로전서 2장 9절)을 무시한 구약성경의 ‘제사장’이나 ‘레위 지파’ 등을 이용하며 사실상 유대교에 기댄 주장을 펴고 있다고 비판했다(양희송,『다시 프로테스탄트』91쪽). 그 목사는 베드로전서 2장 9절을 근거로 평신도나 목회자 모두 만인사제라는 종교개혁가 루터의 입장과 전면 배치된다. 그는 교황 레오 10세가 루터를 이단으로 파문한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만인사제설”임을 모르는 신학 부재의 목사다.
더 신랄하게 숭실대 김회권은 당회장 목사를 교황에 버금가는 권력가로 규정한다. “한국교회의 여러 문제 중의 하나는 당회장 목사의 독재적 교회 정치다. 교황에 버금가는 권력과 재력을 휘두르며 거의 예수를 대신하는 듯 한 중보자 행세를 한다.
그들의 종교적 열심, 화려한 설교, 교회를 재정적으로 양적으로 성장시키는 영적 카리스마 등은 모두 당회장의 권력 강화와 권력 남용의 도구가 된다. 교회 헌금을 갖고 문어발식 사업 확장을 하고 그 사업들을 각각 아들들에게 승계시키며 그것과 관련된 비리를 시정하라고 권고하는 장로들 300명을 일거에 출교시키는 당회장 목사(이것은) 한국교회의 일탈된 당회장권이다.
대형 교회의 당회장들이 보여주는 저질스러운 종교 권력 행사는 중소형 교회 당회장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100명 정도의 교회 당회장에게도 경직된 권위주의가 풍길 때가 있다. 개신교회는 가히 루이 16세 급 독재 권력을 휘두르는 1인 담임목회자의 리더십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묻다』250쪽).
그는 또한 신교황주의 시대를 우려하고 있다. “교회를 개척한 이후 한 교회를 수십 년 맡아 목양해온 담임목사의 권위는 제도적으로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다. 이런 맥락에서 당회장 세습도 가능하고, 당회장 목사의 각종 비리도 발생하고, 교회 재정의 금융투자, 혹은 불건전한 재테크 투입도 가능하다.
교회의 이런 경직성과 폐쇄된 분위기 속에서 목사의 권력 강화, 평신도에 대한 목사 우위권이 공리처럼 받아들여진다. 한국교회 전체를 볼 때 대형 교회의 담임목사가 자신이 일구어 온 목회적 성과를 마치 자신의 업적인양 착각해 자신이 누려도 된다는 기업가 의식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가정부의 일과 사제의 일이 하나님 앞에서는 동등하다고 선언하며 만인은 자신의 직업 영역에서 제사장적인 역할을 한다고 본 마틴 루터의 만인제사장설은 증발되고 말았다. 다시금 신교황주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묻다』253쪽).
김회권은 한국교회에 사제주의가 등장하는 이유를 다섯 가지로 제시하지만 네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교회 안에 유교문화가 잔존하기 때문이다. 가부장 권위주의는 공동담임목사제나 담임목사 윤번제는 상상할 수도 없다.
둘째, 목사들의 구원론적인 지위 과시와 교회를 구원의 분여 처소로 보는 독특한 교회론 때문이다. 당회장 목사는 설교와 성례 집전을 거의 도맡아 하며 구원의 분여자 이미지를 강화한다. 그는 새벽기도, 부흥집회, 송구영신예배 등에서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직접 안수기도를 해줌으로써 영적 카리스마를 과시한다. 당회장 목사는 설교나 기도를 통해 자신이 하나님과 아주 가깝다는 것을 과시하고 평신도들을 확실하게 천국으로 인도해주는 중보자라고 내세운다.
셋째, 민수기 11-16장에 나오는 반 모세-아론주의자들이 당했던 신적 응징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참아준다. 목회자의 설교에 약간의 의심과 반대만 표해도 고라와 다단, 아비람의 후예, 더 심한 경우 가룟 유다라는 저주를 받게 된다.
최근에 은퇴한 노추한 당회장 목사는 자신이 30년 목회한 교회로부터 교회 재산의 10분의 1을 당회장 은퇴 금으로 내놓으라는 요구를 후임 담임목사와 당회에 요구했다. 후임 목사와 당회가 이 요구를 듣지 않자 주일설교에서 “지금 우리 교회 당회에는 사탄의 심부름꾼이 네 명 정도 암약하고 있다”라는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
넷째, 평신도들이 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영적 갈등이 없기 때문에 목회자들의 횡포와 일탈이 백주대낮에 벌어지고 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한국교회의 목사는 종교개혁 이전 시대의 사제의 위상을 보유하게 되었다(『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묻다』256-257쪽)는 것이다.
사제주의의 연원은 플라톤의 이원론이다. 김회권에 의하면,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원론은 플라톤의 이원론에서 연원되었다. 그것은 육체는 소멸하지만 이데아의 세계의 일부인 영혼은 소멸하지 않는다고 믿는 영혼우위론적 철학이었다. 이 이원론은 시간과 영원, 육체와 영혼,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평신도와 사제의 이원론으로 전화되었다. 이 이원론을 바탕으로 성직자 우위론의 교회를 세웠다”(『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묻다』257-258쪽).
마틴 루터는 이런 이원론 교회 관에 맞서 오직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 중보자라고 선포했다. “그리스도를 통하기만 하면 성직자와 평신도나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갈 수 있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오로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그리스도만 유일한 중재자라고 본다.
일곱 가지 성례전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매개하는 사제들의 중개 기능이 구원에는 아무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루터는 영적 그리스도인과 세속적 그리스도인으로 나누는 중세교회론을 비판했다. (루터의) 만인제사장설은 시민계급의 무역활동, 상업 활동, 제조업 분야 등 모든 경제 활동의 신성화를 초래했다. 자신의 직업 영역에서 사제적 중보 활동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구원받은 성도의 표징이라고 본 루터는 주일중심에서 6일 중심으로, 사제중심에서 평신도 중심으로 교회 무게중심을 옮겨놓는데 기여했다”(『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묻다』260-261쪽)
사실 목회자를 교황에 버금가는 권력가로 만든 장본인은 노예근성을 가진 평신도들이다. 김회권은 평신도의 노예근성을 심하게 질타한다. “독재적 목회자는 평신도 교인들의 노예근성과 제휴하기 쉽고 그들의 마조히즘적 감성을 충족시키는 수단이 될 수 있다.
한국교회의 성숙과 발전을 위해 당회장 목회자에 의해 조장되는 평신도 우민화는 시급하게 시정되어야 하며 평신도들에게 오로지 믿고 순종하는 ‘아멘형’ 우민이 될 것을 강요하는 반민주적이고 반 성령적인 목양 행태는 혁파되어야 한다는 것이다(『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묻다』251-252쪽). 평신도들은 예수의 말과 목사의 말을 구별 못하는 경우가 있다.
김회권은 또한 교회 시스템의 불합리를 지적한다. “현재 대부분의 한국교회에서 당회장과 당회는 교회 인사권, 재정 사용권, 교회 선교와 사역 의제 설정 권까지 다 보유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다수인 여성 교인, 청년 교인, 청소년 및 아동 교인들은 당회장이나 당회의 사역 우선순위나 재정 투입 대상의 우선순위 목록에서 제외되거나 소외된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거룩하게 낭비되어야 할 교회 재정이 부동산 매입이나 고위험 고수익 금융 상품 매입에 투입된다”(『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묻다』252쪽).
이렇게 잘못된 권위주의에 기댄 목회자는 신본주의마저 악용한다. 교회는 민주주의democracy가 아니다. 신본주의theocracy라고 설교 강당에서 외친다(양희송, 104쪽). 그러나 종교개혁이 근대 민주주의 형성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강력한지 모르는 무지의 결과라고 양희송은 지적한다.
오히려 민주주의는 기독교 인간관을 반영한다는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의 통찰은 설득력이 강하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선함은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고 인간의 죄성은 민주주의를 필요로 한다.
민주주의가 기독교 인간관을 잘 반영함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를 거부하고 신본주의를 내세우는 데에는 잘못된 권위주의에 기댄 이해관계가 깊이 연관되기 때문이다. 결국 신본주의는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를 거부하기 위한 도구로써 신본주의를 악용한다.
목회자가 권위주의 의사결정을 갖기 위한 악용 사례로는 “세습을 하면 세대교체에서 발생하는 시기심을 막을 수 있다.” “목사의 아들이란 이유로 역차별을 받아서야 되겠느냐” “고생 끝에 얻게 된 성공의 과실은 누구보다도 가족, 특히 자녀들에게 돌아가야 마땅하다”는 정당화를 위한 심리기제가 작용한다(양희송, 102쪽).
심지어 “교회에서 담임목사의 교체는 심장을 이식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조직에 부작용이 생기면 몸인 교회가 위기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아들을 선택했다”는 김선도의 아들 세습에 대해 “언제부터 교회의 심장이 예수가 아니라 담임목사였는가(양희송, 104쪽)”라는 김동호의 반박은 잘못된 권위주의에 대한 일갈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