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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스토리 산방(山房) 이야기]   당연하게  일어나는 모든 것들 공감 하지 못하고  분별하고 판단하려 한다
[힐링스토리 산방(山房) 이야기] 당연하게 일어나는 모든 것들 공감 하지 못하고 분별하고 판단하려 한다
[정치닷컴/휴먼리더스= 정무공 글.사진] [북한산 청학사 주지/안흥사 총무] 그렇게 아름답게 수놓은 꽃들도 시간을 거슬러 있을 수 없고 그렇게 향기로운 꽃 내음도 바람 따라 흐르며 사라지니 언제 왔다가 언제 갔는지 인사도 없이 사라지네. 나무에는 꽃의 흔적이 없고 허공에는 향기의 흔적도 없네. 우리의 삶도 꽃과 같으니 이것이 바로 무상이라네. 아카시아 꽃향기로 가득하여 벌들 소리가 한창이다. 아카시아 꽃에서 꿀을 모이기 위해 벌통을 산 중턱에 설치하니 벌들이 요란스럽게 날아다닌다. 꽃이 있는 곳에 나비가 있다고 하는데 지금은 벌이 더 많다. 물론 지금도 나비가 있지만 나비는 가을에는 훨씬 많이 찾아온다. 아카시아 꽃들이 마치 포도송이가 달려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팝나무 꽃이 지고 아카시아 꽃이 바통을 이어 받았다. 길가에는 데이지 꽃이 풍성하게 피어있고 바위틈에는 돌나물 꽃이 넓게 펴져있다. 산에는 재미있게도 마라톤 하듯 꽃들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 덕에 눈과 코는 호강을 한다. 그러나 꽃들은 안타깝게도 오래가지 않고 금방 지고 만다. 이럴 때 화무십일홍(花無十一紅)이란 말이 생각난다. 열흘 붉은 꽃은 없다는 뜻으로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십일을 넘기지 못한다고 한다. 또한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란 아무리 막강한 권력도 십년을 넘기지 못한다고 하여 둘 다 무상(無常)을 뜻한다. 꽃들이 질 때면 언제나 우리에게 다양한 가르침을 주는 것 같다. 중국 속담에는 인무천일호 화무백일홍(人無千日好 花無百日紅)이란 말이 있다. 사람은 천일동안 한결같이 좋을 수는 없고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백일동안 붉게 피지는 못한다. 언제나 항상 할 것 같았던 것들은 아쉽게도 금방 사라지고 그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무상의 진리는 변함이 없다. 온 것은 반드시 서서히 변하여 사라지기 마련이다. 다만 그 과정 속에서 우리의 마음은 가장 아름다웠던 그 때를 기억하며, 마음속에 그대로 붙잡아두고자 하는 갈망이 있다. 그러나 사라져버린 후에는 아쉬움이 되고 추억이 되어 다음을 기약한다. ‘내년에는 또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을 볼 수 있겠지’ 하면서 아쉬움을 달래본다. 항상 좋은 사람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 가끔 본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겠지만, 함께 산다면? 답은 독자들에게 돌리도록 한다. 너무나도 좋아서 함께 무언가를 하게 된다. 그 시작은 참으로 아름답고 좋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소소한 것들이 일어나도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던 어느 순간 좁혀지지 않는 무언가가 그들 사이를 위협한다. 이해되지 않는 접점이 생기게 되면 그 때부터 서로간의 주장을 이해시키려 노력하며,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게 된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바꾸려하기 때문에 결코 서로가 서로를 물러서지 않게 만든다. 그러면서 그 문제를 풀기보다는 그저 덮고 넘어가는 것이 서로에게 더 이상 상처주지 않을 것이라 타협한다. 하지만 언젠가 또다시 그 문제가 일어나면 서로의 감정을 상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좋아서 시작하게 된 관계, 즉 연인, 친구, 일 등 함께 하는 모든 것들이 항상 좋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무상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꽃이 피는 것은 우리가 태어나는 것이며, 꽃이 지는 것은 우리가 죽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벌과 나비들이 찾아와 꿀을 가져가고, 각종 벌레들이 줄기를 타고 잎으로 꽃으로 다니며 힘들게 한다. 또한 바람이 불고 비가 오며, 햇볕이 내리쬐는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며, 꽃이 시들 기도 전에 떨어지기도 하고, 기온이 급변하여 금방 지기도 하며, 온갖 원인으로 인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이러한 과정은 곧 우리네 삶이며,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깨달을 것인가? 무상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무상함을 알아차리며 살지는 않는다. 무상함을 잘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자세히 관찰하고 살펴보아야 한다. 어떻게 변화하고 사라지는지를. 어떠한 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언제나 분별하고 판단하려 한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보면 공감보다는 분별하여 판단해주기 바쁘다. 어떤 것은 잘했고, 어떤 것은 잘 못했고, 이것은 좋은 것이며, 이것은 나쁜 것이라면서 결론까지 지어주기에 바쁘다. 그렇게 이야기하다보면 판사들만 있다. 아! 내가 지금 재판을 받으려고 이야기를 했나? 그래서 사람들이 질문을 하지 않으면 그저 듣고만 있어도 편안할 때가 있다. 이야기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이렇게 하라고 답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답이 정답인지 오답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해답을 듣고 싶은 이들에게는 큰 위안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이야기를 할 때 가장 큰 위안은 공감이지 답을 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답은 스스로의 마음속에 이미 정해두고 있을 때가 훨씬 많다. 단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 확인하려 이야기를 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판사역할을 잠시 멈추고, 상대를 공감해야한다. 첫 번째로 꽃은 우리에게 공감을 하게 해준다. 꽃을 보면서 우리는 표현을 한다. ‘이쁘다’, ‘아름답다’, 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얼굴의 표정으로 공감을 표현하기도 한다. 있는 그대로를 느낀 것을 되돌려 준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생각으로 분별하여 판단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느낀 것을 표현할 뿐이다. 이렇게 상대방이 힘들어하면, ‘힘들구나’,하고 슬퍼하면, ‘슬프구나’, 좋아하면, ‘좋아하는구나’, 하고 공감을 해주는 것이다. 여기에 ‘왜? 무엇 때문에? 누가?’ 하는 등의 따지는 말들은 오히려 공감을 방해한다. 분별심을 멈추면 공감하기가 훨씬 쉽다. 힘들어할 때 누군가 ‘힘들지’하는 말 한마디에 위로가 되고, ‘힘내세요’라는 말 한마디에 용기를 낸다. 생각을 말하는 것은 쉽지만 감정을 표현하는데 익숙하지 않은 우리에게는 이런 공감이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연습을 통해 우리는 자연에게 공감하는 것처럼 주위의 사람들과 모든 것들에게도 공감을 해보자. 바로 이 공감을 통해서 무상함을 더 절실히 느낄 수 있지는 않을까? 평소에 공감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무상함을 잘 느끼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저 당연하게 스쳐지나가고 일어나는 그 모든 것들에 우리는 공감을 하지 못하고 있다. 공감을 한다면 작은 것 하나 하나 변화하고 있고 그로인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모든 것들이 무상하다는 것을 공감한다면 우리의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눈은 밝고 지혜로워질 것이다. 두 번째로 꽃이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는 방법은 바로 상실이다. 꽃이 지고 나면 우리는 찾게 된다. 언제 떨어졌는지 모르게 없어졌기 때문이다. 상실의 아픔은 우리를 힘들게 한다. 다만 꽃은 우리가 집착하는 마음을 깊이 두지 않기 때문에 잠깐의 상실을 경험할 뿐이다. 그러나 소중한 것의 상실은 우리로 하여금 큰 괴로움을 준다. 그 이유는 영원했으면 하는 바람이거나 영원할 것이라는 마음 때문이다. 무상함을 알지만 우리의 마음은 항상 그랬으면 하는 마음이 더 간절하여 무상을 잊고 살아간다. 그러나 상실이 찾아오면 우리는 크게 괴로워하며, 깨닫게 된다. 아! 무상하구나. 원래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아픔과 슬픔과 괴로움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때에 우리의 마음은 평온해짐을 느낀다. 고요함과 평온함이 우리의 마음에 가득할 때 우리는 무상에 대해서 깊이 깨닫게 된다. 최근에 가족과 같이 친한 도반이 다녀갔다. 왔을 때 너무나도 반가운 마음으로 공감하고 가고 난 뒤 그 빈자리가 나에게는 상실로 다가와 무상을 일깨워준다. 홀로 방에 앉아 차를 마시며 무상을 생각하게 해주는 참으로 고마운 도반이다. 밖을 나갔다가 돌아오면 나를 반겨주던 금강이와 아지, 장군이가 꼬리치며 내려오지 않고 위에서 쳐다 만 볼 때 순간 나의 마음은 ‘어라? 이것 봐라!’ 하다가도 어디가 아픈지, 힘이 드는지, 나이가 들어 귀찮은지 걱정이 앞선다. ‘그렇지! 얘들이 항상 나를 반겨주러 꼬리를 흔들며 뛰어내려 와야 하는 것은 아니지!’ 하면서 무상함을 알아차려본다. 항상 그러한 것이 없다는 것을 매 순간 마음에 일깨워 주는 모든 것들이 바로 스승이 된다. 지금도 모든 것이 변하고 있는 이 무상함을 항상 느껴보자. 그리고 나의 삶에서 무상함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늘 되돌아보자.
[산사 탐방]  어떤 향기가 나는 사람인지 느껴지시나요? -북한산 산방 이야기
[산사 탐방] 어떤 향기가 나는 사람인지 느껴지시나요? -북한산 산방 이야기
[정치닷컴=심은영편집기자] 바람을 타고 내려오는 향기 버선발로 뛰어 내려오듯 라일락 향기가 나를 반겨주네. 향기가 나의 몸과 마음을 살며시 스치고 지나가니 덕의 향기로 가득하네. 바람을 거슬러 올라가니 라일락 향기가 진동하고 우리의 마음도 덕향으로 가득하네. [사진=정무공 스님] 5월의 향기는 바람을 타고 찾아왔다. 걸을 때 마다 라일락향기가 진동을 하고 코끝을 자극한다. 아름다운 향기는 바람을 타고 계단을 걸을 때면 라일락이 피어있는 곳까지 걸어가기도 전에 내려와 우리를 맞이한다. 그럴 때면 내가 손님이 된 것 같아 괜히 기분이 좋다. 반가운 손님이 찾아오면 버선발로 나와 반겨주던 우리의 옛 문화를 지금도 자연은 손수 실천하고 있는 듯하다. 라일락의 꽃향기를 맡으며 라일락을 심었던 분의 정성어린 마음과 간절함이 느껴진다. 누군가를 위한 그 마음이 꽃향기를 타고 전해져 마음을 울리니 그 향기가 더욱 진한 것 같다. 그 향기는 무엇을 전하기 위해 이리도 진하게 멀리까지 퍼져나가는가? [사진=정무공 스님] 사물에도 향기가 있고, 생물인 동물과 식물에게도 향기가 있고 당연히 사람들에게도 각자의 향기가 있다. 먼저 사물의 향기란 특유의 각각이 가지고 있는 향기가 있을 것이며, 또한 쓰는 사람에 따라서 그 물건의 가치가 향기로써 전해지기도 한다. 오래된 물건이라던가, 의미 있는 물건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 누가 한가지쯤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나도 의미 있고 소중한 염주가 두 개가 있다. 그것은 처음 출가를 하여 머리를 깎고 받은 것과 선배스님이 준 기도할 때 쓰던 나의 가장 소중한 염주가 하나 있다. 이 두 가지는 항상 잘 보관하여 놓아둔다. 그리곤 가끔씩 생각이 날 때 들여다보며 그 시절의 추억에 잠시 빠져들곤 한다. 이렇게 사물에도 사물이 가지고 있는 의미의 향기가 있다. 그리고 동물들에게도 향기가 있다. 우리 절에는 3마리의 강아지가 있는데, 이 친구들이 가장 먼저 하는 것은 바로 냄새 맡기이다. 언제나 채취를 통해 교감을 한다. 한 친구는 자신의 몸을 계속 나에게 비비며 고양이처럼 자기를 만져달라고 한다. 그러면 어느 순간 나의 옷에 털과 냄새가 묻곤 한다. 강아지들마다 특유의 냄새가 있어 서로 다른 향을 느낄 수 있다. 3마리의 강아지도 모두 다르다. 아무리 냄새가 안 난다고 하여도 밖에 있다가 개를 키우는 집안으로 들어가면 그 특유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식물 또한 이와 같다. 식물은 무향도 있지만 특유의 향이 연한 것부터 진한 것까지 여러 가지 향들을 내뿜고 있다. 특히 난의 경우 어떤 사람은 향기를 맡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미세한 향기까지도 맡는 사람이 있다. 대부분의 꽃은 향기를 내어 그 주위에 가게 되면 어김없이 향기를 맡을 수 있다. 특히 목련꽃과 라일락 꽃향기는 길가를 향기롭게 해준다. 마지막으로 사람의 향기다. 사람에게도 저마다 향기가 다르다. 여러분은 어떤 향기가 나나요? 주위의 사람들은 어떤 향기를 내고 있나요? 지금 한번 느껴보세요. 어떤 향이 나는지 눈을 감고 나를 느껴보고, 주위의 사람들을 느껴보세요. 어떤 향기가 나는 사람인지 느껴지시나요? 사람의 향기란 바로 그 사람의 말과 행동 그리고 마음이다.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마음이다. 말과 행동은 마음의 일어남에 따라서 나타난다.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어떤 행동이나 말로 표현되지 않을 것이다. 마음 없이는 어떤 것도 그냥 일어나는 법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마음이 곧 향기이다. 이 향기는 꽃의 향기와는 다른 점이 있다. 바로 꽃향기는 바람을 따라 흘러가지만, 마음의 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는 것이다. 다음의 구절이 바로 법구경의 화향품의 한 구절이다. [사진=정무공 스님] 花香不逆風 芙蓉檀香 德香逆風薰 德人聞香 “꽃향기는 바람을 거스르지 못한다. 연꽃도 전단나무향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덕 있는 사람이 풍기는 덕향은 바람을 거슬러 어디서든 들려온다." 불교에서는 본래 계향(戒香), 정향(定香), 혜향(慧香), 해탈향(解脫香),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이라고 하여 5가지 향은 곧 부처님을 뜻하며 부처님께 향을 올리고 예를 표하는 것을 오분향례라고 한다. 계향이란 계를 지킴으로써 탐(貪)심을 여의고, 정향이란 마음의 선정으로 진(瞋)심을 여의고, 혜향이란 바른 지혜로써 치(痴)심을 여의고, 해탈향이란 탐진치 삼독을 여의어 윤회를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를, 해탈지견향이란 탐진치 삼독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한 것을 명확히 알고 보는 것의 향기를 뜻한다. 이처럼 덕이 있는 사람의 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어디든지 가며, 어디에서든지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덕향은 사람과 사람의 사이에서 전해지며, 지금처럼 신문이나, 대중매체,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로 알려진다.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는 덕의 향기를 풍기는 사람은 금방 알려지고 휴대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빠르게 전해져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다들 그 사람의 이야기를 공통의 주제로 한마디씩 이야기하기 마련이다. 강원도에 산불이 나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을 때 기부금을 내신 분들의 이야기는 하루도 지나기 전에 검색엔진의 홈페이지 메인에 자리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예전에는 이처럼 빠르지는 않았지만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퍼졌으며, 글로써 기록을 통해 전해졌다. 또한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와 성인들의 가르침을 배우며 존경하고 예를 올리기도 한다. 그분들의 향기는 몇 천 년이 지나도록 지금까지도 흐르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전해질 것이다. 꽃향기는 꽃이 지면 사라지지만 덕의 향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마음의 향기는 두고두고 전해진다. 특히 어떤 사람의 은혜를 입거나 감사한 일들을 겪는다면 그 향기는 우리의 삶에 있어 소중한 기억으로 잊혀지지 않는다. 삶에 있어 이러한 일들은 오래도록 기억되며 그 향기를 그리워하고 또 그 향기를 서로 공유한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러한 향기를 내기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그러한 존재가 되기 위한 노력을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한사람의 덕향을 통해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덕향을 주는 존재로 탈바꿈하게 되는 순간 우리의 삶은 달라지게 된다. 덕향을 받는 사람에서 덕향을 주는 사람으로 우리의 삶을 만들어 간다면 우리 주위는 계의 향기, 선정의 향기, 지혜의 향기로 가득할 것이다. [사진=정무공 스님] 이제 꽃은 하루가 다르게 지고 있으며, 그 향기 또한 그와 같다. 꽃이 없으면 향기도 없다. 꽃은 그렇게 자취를 남기지 않고 다음해를 기약하며 언제 있었냐는 듯 사라져 버린다.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이 우리의 마음과 같다. 언제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아주 강하게 일어나기도 했다가 어쩔 때는 일어났는지, 일어나지 않았는지 모를 때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일어난 것은 머물러 있다가 서서히 변하여 사라진다. 향기가 느껴지지 않을 때면 어김없이 꽃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마음을 알아차릴 때면 이미 사라지고 없는 것처럼. 그것은 일어난 순간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항상 뒤늦게 알아차려보면 이미 일어나서 모든 일을 마치고 난 뒤다. 그렇게 우리는 후회를 하며 살아간다. 이제 우리는 후회하지 않기 위해 지금 이 순간을 알아차림 하자. 지금 내 마음에 어떤 것이 일어나는지, 어떤 감정, 생각, 갈망이 일어나는지 알아차려보자. 그것이 곧 나의 향기이다. 나의 말과 행동으로 이어질 나의 마음을 어떤 향기로 만들어 갈 것인지 숙고해 보아야 한다. 이제 우리의 아름다운 향기를 바람을 거슬러 널리 퍼뜨려보자! [사진=정무공 스님]
[힐링스토리]   산방(山房)이야기-‘받아들이는 것’에는 어떠한 조건도 붙지 않는다.
[힐링스토리] 산방(山房)이야기-‘받아들이는 것’에는 어떠한 조건도 붙지 않는다.
[사진=무공스님] [정치닷컴=심은영] 길 따라 걸어가는 바쁜 걸음걸음 무엇이 발걸음을 재촉 하는가 그 순간 멈추어 무엇을 보았는가 바위 아래 피어있는 작은 양지꽃 언제부터 거기서 나를 보았나 양지꽃이 못 본 것은 아니었구나 양지꽃도 나를 보고 나도 양지꽃을 보네. 꽃샘추위 치고는 요란하게 눈이 한바탕 내리고 떨어졌던 기온이 다시 올라왔다. 언제 왔는지 모를 봄의 따뜻함은 가랑비에 옷이 젖듯 우리에게 안온함을 선사해 준다. 스쳐 지나가던 돌담길과 화단에는 어느새 꽃이 피어있고 산중에도 꽃들이 피어난다. 산에는 양지꽃과 생강나무 꽃이 피었으니 앞으로 개나리와 진달래도 서서히 그 모습을 환하게 드러낼 것이다. 그러는 동안 작은 꽃들은 이미 돌 틈 사이에 하나씩 피어 그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고 당당하게 그 자리에 피어있다. 봄에 내리는 단비는 봄을 알려주는 모든 존재들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특히 이 단비는 큰 나무들에게도 도움을 주지만, 작은 꽃들에게는 더욱 소중하다. 큰 나무들에게는 다소 부족할 수 있는 봄비이지만, 양지꽃, 제비꽃, 할미꽃과 같은 작은 꽃들에게는 가장 알맞고, 적절한 영양분을 공급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맞은 때에 적절히 내리는 단비는 언제나 감사할 따름이다. 우리에게도 단비와 같은 존재가 있을 것이다. 우리들의 단비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목적지를 정해 놓고 걸어갈 때에는 무언가 모를 힘이 우리를 그곳으로만 이끌어가기 때문에 주변을 보지 못하게 한다. 아니,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그저 앞만 보고 달려간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이 시대의 경제성장을 이룩하게 해준 자부심과 우월감 추구는 점점 우리로 하여금 병들게 만들었다.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러한 자부심과 우월감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서 두려움, 복종, 스트레스, 불안, 우울 등의 사회적 평가와 관련된 정신병리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무공스님] 이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발전해 나아가야만 하는 압박감에 시달리게 되고 그로 인해 더욱 피폐해져 가는 자신을 볼 수 있다. 사실 열등감 즉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는 더 많이 노력해야하고, 쉬지 않고 달려야하며, 더 높이 올라가야만 한다. 잠시라도 그 끈을 놓는 순간 이미 순위에서 뒤쳐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스스로를 비관하며, 자책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인간의 순수한 본연의 마음인 사랑하고 함께하는 자비의 마음은 그보다 훨씬 더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게 해준다. 앞만 보지 말고 옆도 보고 뒤도 돌아보고 아래 위도 쳐다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산을 오르다보면 참 좋은 것들이 있다. 보지 못한 것을 살펴보게 되고, 작은 것에도 관심을 가지고 된다. 목적지에 빨리 오르는 것은 산행에 있어 좋은 것들을 놓치게 될 때가 많다.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도 주요리가 아무리 맛있는 것이라 하여도 다른 반찬이나 샐러드 등의 부가적인 음식들도 함께 먹는 것처럼 산행도 그와 같다. 가는 길에 풍경들과 발밑에 피어 있는 작은 꽃과 산나물, 돌과 나무들까지 보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 사진도 찍고 잠시 앉아 담소도 나누며, 오늘은 오롯이 산을 받아들이리라는 마음으로 산행을 하면 또 다른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목적지를 향해 가는 과정이 사실 산행의 묘미이다. 예전에 에베레스트를 등반하는 영화를 본적이 있다. 거기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산이 그대를 받아주어야 산에 오를 수 있다. 산이 받아주지 않는다면 정상에 오르지 못할 것이다. 우리도 이러한 마음으로 산을 올라야 한다. 마치 정복하듯 목적지를 찍고 오면 할 일을 다 한 것 같은 자부심! 이 마음이야 말로 참으로 어리석다. 산을 정복한 것이 아니라 산이 나를 받아주었을 따름이다. 이제는 이 넓은 마음을 가진 산을 우리도 마음의 문을 열고 함께 공감하고 소통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산을 온전히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인가? 닫혀있는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눈의 마음, 귀의 마음, 코의 마음, 혀의 마음, 몸의 마음의 문을 열고 자연을 받아들여야 한다. 마음의 문을 연다는 것이 어려운 것 같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길을 걸어갈 때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 상가의 간판들, 차들을 지나쳐 지나가지만 마음의 문을 열고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문 앞에 머물러 있다가 그저 스쳐지나간다. 잘 아는 사람이 옆을 지나가도 골똘히 한 생각에 빠져있으면 모르고 스쳐지나가게 된다. 그러나 마음의 문을 열고 받아들인 것은 각인이 된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좋아하였을 때 우리는 또 보고 싶고, 자꾸 생각이 나고, 그 자리에 서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아쉬워한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문을 연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의 문을 내가 좋아하는 것에만 열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고 마음을 열지 않으려 한다. 물론 그 이유는 모두에게나 있을 것이다. 상처받기 싫어서, 부딪히기 싫어서, 피곤하기 때문에, 삶이 각박하니까, 등등의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는 마음을 닫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산은 우리와는 달리 그렇지 않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산은 크고 넓고 위대하며, 신비롭다. ‘받아들이는 것’에는 어떠한 조건도 붙지 않는다. 조건이 없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좋고 싫은 것도, 깨끗하고 더러운 것도 여기에는 없다. 그렇기에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만 한다.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이를 분별없는 마음이라 한다. 착한 사람이 오든, 나쁜 사람이 오든, 부자가 오든, 서민이 오든, 그 누가 오든지 가려서 차별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준다. 우리도 자연을 그렇게 보아야한다. 어떤 꽃이 피었든지 내가 좋아하는 색깔이나, 특정한 꽃이 아니더라도 그 꽃을 분별없이 받아들인다면 어떨까? 그 자체로 진실하고 아름다운 면모를 볼 수 있을 것이 분명하다. 바위 아래 작은 양지꽃을 볼 때면 네잎클로버를 찾으려고 애를 쓰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잘 보이지 않는 찾기 어려운 것을 찾으면 행운이 온다는 말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은 잘 못 찾는 것을 나는 찾았다는 우월감이나 자만심 때문인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풀 한 포기일 뿐인데 얼마나 많은 가치를 부여하고 애지중지하여 예쁘게 펴서 말리려고 책 속에 꽂아 둘 때까지의 그 노력이 가상하다. 하지만 책 속에 넣어두고 나서 언제 넣어 두었는지 잊은 채 한참 후에 책을 꺼내어 훑어보다 발견하면 혼자 미소 짓게 된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것은 신비롭게 느껴진다. 찾을 수 없을 것 같던, 보이지 않을 것 같던 네잎클로버도 자세히 잘 찾아보면 반드시 보이기 마련이다. 허나 우리는 금방 포기하고 만다. 그냥 널리 피어있는 세잎클로버가 눈에 잘 띄기 때문이기도 하고, 귀찮은 마음 또는 다른 곳으로 우리의 마음을 이동하여 네잎클로버를 찾는 것을 포기하게 만든다. 그러나 자리를 뜰 때면 한 가지 마음이 자꾸만 발걸음을 무겁게 한다. ‘잠깐만! 조금만 더 찾으면 분명히 여기에 있을 텐데...’하는 생각이다. 그 생각의 끈을 놓지 않으면 두 손에는 네잎클로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잘 보이지 않았고 잘 찾지를 못했다. 그 때 어머니께서 나에게 네잎클로버 하나를 건넨다. 어떻게 그렇게 잘 찾는지 물어보면 그저 눈에 잘 띄신단다. 나로서는 그런 어머니가 정말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나와 같은 눈을 가지고 어떻게 저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지금에서야 나는 그때를 회상하며 깨우친다. 어릴 때 보지 못했던 것이 지금은 이렇게 보인다는 것을 양지꽃을 보며 절절히 느껴본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냉이와 쑥을 캐러 간 적이 있다. 무엇인지 모르고 그저 밟고 지나갔던 기억이 난다. 어떤 것이 냉이인지 알지 못해서 밟고 지나가면 어머니의 목소리가 나의 몸짓을 멈추게 한다. 아! 이것이 냉이구나, 쑥이구나 하면서 그것을 캘 때 왠지 착한 일을 한 것처럼 성취감을 느끼곤 했다. 내 입으로 들어갈 것은 생각지도 않고 그저 어머니를 도왔다는 큰일을 해낸 것처럼 말이다. 양지꽃은 바로 마음이다. 우리의 마음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항상 잊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그러다 무슨 일이 생기면 그때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기뻐하기도, 슬퍼하기도 했다가 괴로워하기도, 행복해하기도 하며, 우울하고, 불안해하기도 한다. 우리의 마음은 양지꽃처럼 너무 작아서 잘 보지 못하고 살아간다. 반면 우리의 몸은 그렇지 않다. 조금만 자극이 와도 반응하며 잘 챙긴다. 아프면 치료하고 돌보며 즉각 대처한다. 그리고 아프지 않기 위해서 또는 건강하게 살기 위해 항상 비타민과 건강보조제들을 챙겨먹곤 한다. 몸은 커서 잘 보지만 마음은 양지꽃처럼 잘 살펴보지 않는 것 같다. 그렇지만 몸을 이끄는 것은 바로 마음이다. 마음이 없으면 몸은 그저 바위와 같다. 그러나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 몸은 그 찰나에 반응한다. 그래서 몸이 모든 것을 다 하는 것 같지만 사실 마음 없는 몸은 허울 좋은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다. 몸을 잘 가꾸기 위해서는 마음을 잘 가꾸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으로 몸을 잘 가꾸는 것이 될 것이다. 양지꽃을 본다는 것은 사실 나의 마음을 본 것이다. 이를 비추어 본다는 뜻으로 ‘반조(返照)’라고 이야기한다. 밖으로 향해 있는 마음을 다시 안으로 돌리는 것이다. 지금 나의 마음은 어떠한가? 꽃을 발견하고는 ‘이렇게 노란 작은 양지꽃이 잘 보이지 않는 곳에 피어있네?’ 라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아차! 나의 마음을 잘 살펴보지 않고 있었구나!’ 하며 지금 나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어떤 감정, 생각, 갈망이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지금 이 순간의 마음을 알아차림하여 본다. 나를 보고 있는 양지꽃을 통해 나의 마음을 보게 되니 미소로 화답을 한다. 꽃이 나를 보고 웃는 다는 것은 지금 내 마음이 기쁜 것이고, 꽃이 나를 보고 슬퍼하는 것은 지금 내 마음이 슬프다는 것이다. 이는 꽃의 마음이 아니라 나의 마음으로 꽃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꽃 그 자체에는 어떠한 감정도 생각도 갈망도 없이 우리를 바라본다. 봄이 온 지금 밖에 나가면 어디에서나 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꽃을 보고 어떻게 느끼시나요? 꽃이 나에게 무어라 이야기 하나요? 꽃이 어떻게 하고 싶다고 하나요? 그 대답은 곧 우리의 마음입니다. 양지꽃도 나를 보고 나도 양지꽃을 보니까!
[힐링스토리]  북한산, 산방(山房)이야기- 나도 함께 꿈을 꾸네
[힐링스토리] 북한산, 산방(山房)이야기- 나도 함께 꿈을 꾸네
[사진=무공 스님] [정치닷컴=심은영] 언덕 위에 꿈꾸는 몽우리, 나도 함께 꿈을 꾸네. 몽우리는 피지도 않았는데, 나만 먼저 피었다네. 눈이 부시게 반짝이던 북한산의 새하얀 눈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고, 푸른 녹음이 벌써 번지기 시작하였다. 땅에서 아지랑이가 꿈틀대는 것을 보면서도 아직 새벽녘과 황혼이 질 때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면 봄이 온 것이 실감나진 않는다. 마치 겉은 봄과 같고 속은 아직 겨울과 같다. 흔히 어떤 사람을 보고 겉은 따뜻해보여도 속은 차가운 사람이라고 하듯 말이다. 산사의 기온은 지대가 높다보니 도심과 차이가 난다. 그러다 보니 아침에 해가 뜰 때부터 오후 3시경까지는 따뜻함을 만끽할 수 있으나 3시가 지나면서 다시금 겨울을 맞이하는 것 같다. 이렇게 항상 무상을 느끼게 해주는 자연이 참으로 부처님의 설법과도 같이 느껴진다. 무상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그것을 매일 같이 느끼게 해주고, 절실히 알게 해주는 것은 자연이 아닐까? 아직은 어떤 모습으로 피어날지 모르는 여러 야생화와 풀들이 따뜻한 봄이 오는 것을 미리 알고 싹을 틔우고, 봉오리를 맺고, 모습을 드러낼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아름답고, 마음 또한 따뜻해진다. 자신의 할 일을 다 하고 미련 없이 땅속에서 생명력을 비축하고 있다가 다시금 그 아름다움을 보시하기 위해 봄이 되면 어김없이 피어나는 야생화들을 보고 자비를 느끼게 된다. 산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한 야생화의 보시는 그들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 설레게 하고, 아름답고 따뜻한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사진=무공스님. 북한산 야생화] 선한 마음은 바로 이러한 근본적인 마음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마음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픈 심정 말이다. 야생화들의 자생력과 번식력은 참으로 대단하다. 언젠가 한 송이가 피어 있었는데, 몇 년 뒤 그 주변에는 야생화들로 가득하게 되는 것을 보고, 우리들의 선한 마음들도 이와 같이 번져나갔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들의 마음도 야생화처럼 선한 마음을 혼자만 일으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주변으로 확산시켜나간다면 어떨까! 가장 먼저 가까운 이로부터 멀리는 처음 만난 사람들까지도 말이다. 산을 오르고 내리면서 처음 만났어도 서로 인사를 하고 지나가게 되는데, 서로의 안전을 기원하고, 만나서 반갑고, 더 나아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미소로 답하게 된다. 이렇게 산에서는 처음 만난 사람이지만 반갑게 인사하는 그 마음이 바로 선한 마음을 일으키는 시작이 되지 않을까! 선한 마음의 확장은 스스로가 먼저 시작하기에 따라 달라진다. 불교에서는 일체중생들에게 그 복을 회향한다. 모든 생명들에게 건강과 행복, 평온하기를, 그리고 일체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축원한다. 자연은 이렇게 세속의 일상 속에서 잊혀져있던 마음, 즉 사랑과 행복, 평온함 등의 선한 마음들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마치 겨울이 지나 봄이 찾아와 대지를 일깨우듯! 지금 대지는 동면에서 깨어났다. 산사의 새벽예불 소리가 잠을 깨우듯, 우리의 마음도 깨어날 때가 왔다. 우리의 마음에도 봄이 온 것 같다. 어떤 분이 찾아와 봄이 와서 마음에 바람이 들었다고 한다. 이 바람이라는 성질은 어디든지 가고 싶어 한다. 한 곳에 머물러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유롭다. 이분은 지금 떠나고 싶은 것이다. 어디든지, 목적지와는 상관없이 모든 관계에서 자유롭고 싶어 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이렇게 바람 따라 산으로 올라왔나보다. 바람이 들었으니 바람처럼 움직이는 것은 당연하다. 단지 그 바람을 잘 지켜보면서 따라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끌려가기만 하므로 판단력을 잃어버려 그 또한 나에게 자유롭지 못하게 될 것이 자명하다. 좋아하는 일도 직업이 되면 고통스럽다는 말이 있듯이 어떤 일이든지 욕심이 나고, 의도가 생기고, 집착하게 되는 순간, 그것은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자유롭기 위한 그 일이 곧 나를 속박하게 되는 것이다. 산사에서는 그저 흘러가는 대로 놓아두되 그것을 잘 관찰하고 지켜보며 매 순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살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연의 힘에 매몰되어 살아가기가 어려워진다. 매일 저녁 체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날씨! 비가 오는지, 눈이 오는지, 천둥번개가 치는지, 항시 체크를 하고 미리 대비해야 피해를 막을 수 있다. 자연을 관찰하다보면 어느덧 나의 마음을 관찰하게 된다. 모든 것은 나의 마음에 빗대어 보는 것이다. 그냥 보는 법이 없다. 그러기에 같은 것을 바라보지만 모두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다. [사진=청학사] 대상을 바라볼 때 느껴지는 것은 곧 나의 감정과 생각이다. 마치 그 대상이 정말 그러한 것처럼 스스로가 단정 지을 뿐이다. 이것은 진실이라고 하기에는 참으로 위험한 발상이다. 계속해서 그것을 생각하다보면 진실과는 상관없이 진실인 것처럼 되어 있다. 계속 반복되는 생각이 곧 현실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심리적 요인 때문이다. 상상만으로도 우리의 몸과 마음은 실제인 것과 같이 느껴진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고, 싫어하는 사람을 떠올리면 기분이 불쾌한 것과 같다. 그렇기에 어떤 대상을 볼 때에는 먼저 자신의 마음을 보아야 한다. 그 마음을 면밀히 관찰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그 피해를 볼 것이다. 마치 날씨를 잘 살펴보지 않아 피해를 입는 것처럼······. 언덕 위에 꿈을 꾸고 있는 몽우리(꽃망울)를 보면서 피어날 꽃을 생각하니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분명 몽우리를 보았는데 왜 나는 벌써 꽃을 떠올렸는지 모르지만 내 마음이 급한가보다. 그러고 보니 벌써 하루가 지나가고 나를 차분하게 하는 어둠이 찾아왔다. 급한 마음을 달래주는 이 어둠도 어김없이 지나가고 아침이 찾아 올 것이다. 내일 아침이면 나의 몽우리를 터뜨릴 수 있을까? 몽우리가 꽃이 필 때 쯤 나의 꽃도 함께 피어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