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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무엇이 문제인가] 한국교회의 잘못된 권위주의 극복해야
[기독교 무엇이 문제인가] 한국교회의 잘못된 권위주의 극복해야
[정치닷컴=조종건] III. 한국교회의 잘못된 권위주의 극복해야 사회현장을 들여다 볼 때 한국교회가 사회의 적폐냐는 질문은 던질 만하다. 왜냐하면 한국교회가 예수의 정신을 실천하느냐에 대해서 회의감이 들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영향력 있는 목회자들은 물론 작은 교회 목회자들조차 사회영역에서는 성서의 궤도를 이탈해 있다. 3회에 걸친 글에서 지적한 것처럼 교회리더들은 사회문제에 대해 각색된 성서 해석을 적용하고 있다. 만일 이것이 사실과 다르다면, 사회의 근본 뿌리인 정의(justice)가 흔들이고, 거짓말이 난무하고, 약탈사회의 고위험에 대해 직시하지 않고, 안보 선동의 중심에 교회리더들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또 “사람은 ‘그것’ 없이는 살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사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마틴 부버의 통찰력은 ‘소유’ 없이는 살지 못한다. 그러나 ‘소유’만 가지고 사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는 시각에서 한국사회가 인간의 삶을 외면하고 개•돼지처럼 소유만을 지향하는 성장주의, 규모의 경제, 돈이 주인인 자본주의를 맹종하는 공범이 한국교회가 아니라는 것에 대해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 예수처럼 사회 현장에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구체성 있는 실천이 과연 한국교회에 있는가. 성서의 궤도를 이탈한 또 다른 현상은 잘못된 권위주의다. 목사는 기능직임에도 불구하고 신분 직으로 오해하고 있다. 박사과정 때, 다섯 살 아래인 어느 합동측 목사가 평소 대화에서 반말하는 것을 보고 교양 없는 목사라고 생각했지만 목회자는 평신도와 신분상 다르다는 잘못된 권위주의를 갖고 있다. 마치 이것은 1960년대 집주인 아들이 머슴보다 스무 살 아래임에도 불구하고 반말이 가능한 신분제처럼 생각하는 잘못된 권위주의 혹은 사제주의와 유사하다. 양희송은 ‘목사직은 세속 직업과는 다른 성직’이란 해묵은 이원론은 민망한 표현이라고 했고, 신약(베드로전서 2장 9절)을 무시한 구약성경의 ‘제사장’이나 ‘레위 지파’ 등을 이용하며 사실상 유대교에 기댄 주장을 펴고 있다고 비판했다(양희송,『다시 프로테스탄트』91쪽). 그 목사는 베드로전서 2장 9절을 근거로 평신도나 목회자 모두 만인사제라는 종교개혁가 루터의 입장과 전면 배치된다. 그는 교황 레오 10세가 루터를 이단으로 파문한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만인사제설”임을 모르는 신학 부재의 목사다. 더 신랄하게 숭실대 김회권은 당회장 목사를 교황에 버금가는 권력가로 규정한다. “한국교회의 여러 문제 중의 하나는 당회장 목사의 독재적 교회 정치다. 교황에 버금가는 권력과 재력을 휘두르며 거의 예수를 대신하는 듯 한 중보자 행세를 한다. 그들의 종교적 열심, 화려한 설교, 교회를 재정적으로 양적으로 성장시키는 영적 카리스마 등은 모두 당회장의 권력 강화와 권력 남용의 도구가 된다. 교회 헌금을 갖고 문어발식 사업 확장을 하고 그 사업들을 각각 아들들에게 승계시키며 그것과 관련된 비리를 시정하라고 권고하는 장로들 300명을 일거에 출교시키는 당회장 목사(이것은) 한국교회의 일탈된 당회장권이다. 대형 교회의 당회장들이 보여주는 저질스러운 종교 권력 행사는 중소형 교회 당회장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100명 정도의 교회 당회장에게도 경직된 권위주의가 풍길 때가 있다. 개신교회는 가히 루이 16세 급 독재 권력을 휘두르는 1인 담임목회자의 리더십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묻다』250쪽). 그는 또한 신교황주의 시대를 우려하고 있다. “교회를 개척한 이후 한 교회를 수십 년 맡아 목양해온 담임목사의 권위는 제도적으로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다. 이런 맥락에서 당회장 세습도 가능하고, 당회장 목사의 각종 비리도 발생하고, 교회 재정의 금융투자, 혹은 불건전한 재테크 투입도 가능하다. 교회의 이런 경직성과 폐쇄된 분위기 속에서 목사의 권력 강화, 평신도에 대한 목사 우위권이 공리처럼 받아들여진다. 한국교회 전체를 볼 때 대형 교회의 담임목사가 자신이 일구어 온 목회적 성과를 마치 자신의 업적인양 착각해 자신이 누려도 된다는 기업가 의식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가정부의 일과 사제의 일이 하나님 앞에서는 동등하다고 선언하며 만인은 자신의 직업 영역에서 제사장적인 역할을 한다고 본 마틴 루터의 만인제사장설은 증발되고 말았다. 다시금 신교황주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묻다』253쪽). 김회권은 한국교회에 사제주의가 등장하는 이유를 다섯 가지로 제시하지만 네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교회 안에 유교문화가 잔존하기 때문이다. 가부장 권위주의는 공동담임목사제나 담임목사 윤번제는 상상할 수도 없다. 둘째, 목사들의 구원론적인 지위 과시와 교회를 구원의 분여 처소로 보는 독특한 교회론 때문이다. 당회장 목사는 설교와 성례 집전을 거의 도맡아 하며 구원의 분여자 이미지를 강화한다. 그는 새벽기도, 부흥집회, 송구영신예배 등에서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직접 안수기도를 해줌으로써 영적 카리스마를 과시한다. 당회장 목사는 설교나 기도를 통해 자신이 하나님과 아주 가깝다는 것을 과시하고 평신도들을 확실하게 천국으로 인도해주는 중보자라고 내세운다. 셋째, 민수기 11-16장에 나오는 반 모세-아론주의자들이 당했던 신적 응징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참아준다. 목회자의 설교에 약간의 의심과 반대만 표해도 고라와 다단, 아비람의 후예, 더 심한 경우 가룟 유다라는 저주를 받게 된다. 최근에 은퇴한 노추한 당회장 목사는 자신이 30년 목회한 교회로부터 교회 재산의 10분의 1을 당회장 은퇴 금으로 내놓으라는 요구를 후임 담임목사와 당회에 요구했다. 후임 목사와 당회가 이 요구를 듣지 않자 주일설교에서 “지금 우리 교회 당회에는 사탄의 심부름꾼이 네 명 정도 암약하고 있다”라는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 넷째, 평신도들이 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영적 갈등이 없기 때문에 목회자들의 횡포와 일탈이 백주대낮에 벌어지고 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한국교회의 목사는 종교개혁 이전 시대의 사제의 위상을 보유하게 되었다(『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묻다』256-257쪽)는 것이다. 사제주의의 연원은 플라톤의 이원론이다. 김회권에 의하면,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원론은 플라톤의 이원론에서 연원되었다. 그것은 육체는 소멸하지만 이데아의 세계의 일부인 영혼은 소멸하지 않는다고 믿는 영혼우위론적 철학이었다. 이 이원론은 시간과 영원, 육체와 영혼,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평신도와 사제의 이원론으로 전화되었다. 이 이원론을 바탕으로 성직자 우위론의 교회를 세웠다”(『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묻다』257-258쪽). 마틴 루터는 이런 이원론 교회 관에 맞서 오직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 중보자라고 선포했다. “그리스도를 통하기만 하면 성직자와 평신도나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갈 수 있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오로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그리스도만 유일한 중재자라고 본다. 일곱 가지 성례전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매개하는 사제들의 중개 기능이 구원에는 아무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루터는 영적 그리스도인과 세속적 그리스도인으로 나누는 중세교회론을 비판했다. (루터의) 만인제사장설은 시민계급의 무역활동, 상업 활동, 제조업 분야 등 모든 경제 활동의 신성화를 초래했다. 자신의 직업 영역에서 사제적 중보 활동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구원받은 성도의 표징이라고 본 루터는 주일중심에서 6일 중심으로, 사제중심에서 평신도 중심으로 교회 무게중심을 옮겨놓는데 기여했다”(『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묻다』260-261쪽) 사실 목회자를 교황에 버금가는 권력가로 만든 장본인은 노예근성을 가진 평신도들이다. 김회권은 평신도의 노예근성을 심하게 질타한다. “독재적 목회자는 평신도 교인들의 노예근성과 제휴하기 쉽고 그들의 마조히즘적 감성을 충족시키는 수단이 될 수 있다. 한국교회의 성숙과 발전을 위해 당회장 목회자에 의해 조장되는 평신도 우민화는 시급하게 시정되어야 하며 평신도들에게 오로지 믿고 순종하는 ‘아멘형’ 우민이 될 것을 강요하는 반민주적이고 반 성령적인 목양 행태는 혁파되어야 한다는 것이다(『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묻다』251-252쪽). 평신도들은 예수의 말과 목사의 말을 구별 못하는 경우가 있다. 김회권은 또한 교회 시스템의 불합리를 지적한다. “현재 대부분의 한국교회에서 당회장과 당회는 교회 인사권, 재정 사용권, 교회 선교와 사역 의제 설정 권까지 다 보유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다수인 여성 교인, 청년 교인, 청소년 및 아동 교인들은 당회장이나 당회의 사역 우선순위나 재정 투입 대상의 우선순위 목록에서 제외되거나 소외된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거룩하게 낭비되어야 할 교회 재정이 부동산 매입이나 고위험 고수익 금융 상품 매입에 투입된다”(『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묻다』252쪽). 이렇게 잘못된 권위주의에 기댄 목회자는 신본주의마저 악용한다. 교회는 민주주의democracy가 아니다. 신본주의theocracy라고 설교 강당에서 외친다(양희송, 104쪽). 그러나 종교개혁이 근대 민주주의 형성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강력한지 모르는 무지의 결과라고 양희송은 지적한다. 오히려 민주주의는 기독교 인간관을 반영한다는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의 통찰은 설득력이 강하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선함은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고 인간의 죄성은 민주주의를 필요로 한다. 민주주의가 기독교 인간관을 잘 반영함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를 거부하고 신본주의를 내세우는 데에는 잘못된 권위주의에 기댄 이해관계가 깊이 연관되기 때문이다. 결국 신본주의는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를 거부하기 위한 도구로써 신본주의를 악용한다. 목회자가 권위주의 의사결정을 갖기 위한 악용 사례로는 “세습을 하면 세대교체에서 발생하는 시기심을 막을 수 있다.” “목사의 아들이란 이유로 역차별을 받아서야 되겠느냐” “고생 끝에 얻게 된 성공의 과실은 누구보다도 가족, 특히 자녀들에게 돌아가야 마땅하다”는 정당화를 위한 심리기제가 작용한다(양희송, 102쪽). 심지어 “교회에서 담임목사의 교체는 심장을 이식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조직에 부작용이 생기면 몸인 교회가 위기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아들을 선택했다”는 김선도의 아들 세습에 대해 “언제부터 교회의 심장이 예수가 아니라 담임목사였는가(양희송, 104쪽)”라는 김동호의 반박은 잘못된 권위주의에 대한 일갈이다.(계속)
우리 사회는 어디로 가는가?
우리 사회는 어디로 가는가?
[정치닷컴=조종건] 우리 사회는 어디로 가는가? 공격성이 사회의 중심에 있다. 타인에 대한 배려 없는 야경 도로에서의 눈부신 차량 헤드라이트의 공격성을 보라. 첫째, 자기만 생각하는 사회다. 좋은 현대 교육을 받고 최상의 엘리트 교육을 받는다 해도 결국은 자기중심의 사고다. 둘째, 오로지 소유지향이다. 우리 사회가 큰 집, 큰 차, 큰 건물, 규모의 경제를 추구하는 인간을 생산하고 있다. 마치 우리의 삶이 소유를 위해서 태어난 존재처럼 말이다. 월급만 많이 주면 자신의 타고난 재능(달란트)과 관계없이 기계와 같은 삶도 받아들인다. 황당한 것은 10억 원만 주면 살인도 하겠다는 청소년들이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 소유지향의 하이에나 또는 사자와 다른 점은 무엇일까? 자신만 생각하는 소유지향사회의 결국은 공격성이다. 회의만 하면 회의가 드는 모임, 인간다움은 없고 오로지 이익만 추구하는 천박한 공격사회는 사회재앙을 낳는다. 한진그룹 오너일가의 '갑'질로 촉발된 4월 23일 MBC가 보도한 재벌 ‘갑'질의 역사를 보면, 특권층의 보호막이 우리사회의 기반을 무너뜨린다. 재벌가의 잔인성과 법조계의 고무줄 같은 법적용이 그 중심에 있다. 1994년 롯데 가문 2세 신동학과 그의 친구들이 그랜저 앞에 감히 소형차가 끼어들었다고 운전자를 길가 벽돌로 집단 폭행했다. 조원태 대표의 경우 2000년 교통경찰을 치고 도주했으나 4시간 만에 풀려났다. 한화 2세 김동원은 2011년 새벽 5시 뺑소니 사고를 냈는데 이틀이 지나서야 경찰조사가 이뤄졌으니 음주운전 의심을 밝혀내지 못하고 벌금 정도의 처벌을 받았다. 재벌가와 법조계의 '갑'질은 불평등을 낳고 불평등은 국민 분노의 도화선이다. 재벌가는 법조계와 함께 '갑'들의 보호막을 확실하게 친다. 재벌들은 돈의 힘으로 보호막을 치고, 대기업 노조원들은 노동조합으로 보호막을 치며, 고위직 인사들은 권력으로 보호막을 친다. 각 단체들은 집단행동을 통해 소유의 파이를 잘라갈 때 국민은 나눠 가질 것이 없을 정도의 노예로 전락한다. 공기업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비싼 전월세, 민자고속도로의 터무니없는 통행료와 같은 시스템들이 어디 한두 가지인가! 그리고 국민은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변해 버린다.
한국교회는 사회의 적폐인가? (2)
한국교회는 사회의 적폐인가? (2)
[정치닷컴=조종건] 지난 2월 기고에서 “한국교회는 사회의 적폐인가?(1)”라는 상당히 자극성 있는 질문을 다음과 같이 필자는 제기했다. 한국교회는 사회문제를 다룰 때, 과연 성서에 기대고 있는가? 예수는 크리스천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소금(the salt of the earth)(마태 5장 13절)”이지, 교회의 소금(the salt of the church)으로 가르치지 않았다. 크리스천은 예수를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의 주권자로 고백한다. 그렇다면, 교회가 많을수록 예수가 세상의 주가 된다는 사례들이 많아야 하는데 과연 그럴까? 오늘날 한국교회의 렌즈를 통해 예수의 활동을 보면, 그의 활동 무대가 마치 교회인 것처럼 착각이 든다. 왜냐하면 상당수의 한국교회가 교회의 울타리를 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교인들이 자기 교회만 충성하고 사회 속에서 섬김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하는 목사들도 있다. 1세기 예수의 활동무대가 성전이나 회당에만 국한된 것인가? 예수는 성전과 회당을 사용했지만 오히려 성전을 헐라고 비판했고, 성전과 회당 지도자들을 가혹할 정도로 비판했다. 예수의 진정한 관심은 삶의 자리(Sitz im Leben)다. 예수는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 집에 갔다. 사마리아 수가성에서 삶의 기력을 상실한 여인을 만났다. 예루살렘 베데스다 연못에서 고통과 절망 중에 있는 환자를 만났다.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에서 큰 무리를 만났다. 상당수 한국교회와 달리 그는 성전이나 회당에 머물러 있지 않았고, 그의 활동 중심에는 가나, 수가성, 베데스타, 가버나움, 갈릴리 바다 건너편, 즉 사람들의 삶의 자리였다. 예수를 교회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교회공동체는 예수처럼 삶의 자리를 중시해야 한다. 왜냐하면 리처드 스턴트의 지적처럼 성경은 1,754쪽이지만 ‘정의와 이웃사랑’을 2,000 곳이나 언급했다는 것은 이 주제가 성서의 중요한 가치임을 확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리처드 스턴스,『구멍 난 복음』홍종학 옮김, 41-42쪽). 한국교회 많은 설교내용이나 성경공부가 정의와 이웃사랑에 대해 이상할 정도로 약하다. 심지어 사복음서에 나오는 ‘가난’의 문제를 마음의 가난으로만 해석하는 영지주의 목사들도 있다. 그러니 크리스천 시민운동가들에 대한 교회후원은 상상하기 어렵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많은 교회 리더들이 현대판 영지주의(gnosticism)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에서 경계하는 이단이 영지주의인데, 적지 않은 한국교회 리더들이 현대판 영지주의에 기대는 것은 아닌가. 영은 거룩하고 육은 더럽다는 생각이나 교회는 거룩하고 세속은 더럽다는 것 역시 영지주의다. 목회자와 평신도의 차이를 기능직이 아니라 신분직으로 보는 것도 현대판 영지주의이다. 개인 구원과 같은 영혼구원에만 집착하면서 이웃사랑은 구호에 불과한 것도 같은 현상이다. 중대형교회는 성공한 교회이고 미자립교회는 실패한 교회로 보는 것과 자기 교단만 우월하고 남의 교단을 무시하는 신학생들의 태도도 같은 현상이다. 교인들이 교회 밖에서 기독교시민활동을 하면 눈 밖에 난다는 얘기도 현대판 영지주의 현상이다. 그러니 현실사회 속에서 교회의 가치를 적용하는 것은 미약할 정도 이상으로 사각지대다. 공정한 사회, 신뢰 사회에 대한 관심은 먼 얘기 아닌가. 하나님이 준 자연환경 보호를 교회에서 주도하는 것 또한 상당히 먼 얘기다. 스타필드와 같은 초대형마트로 인한 지역경제 초토화와 같은 경제생태계는 고민의 대상이 아니다. 교회 울타리 안에서의 신앙생활이니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는 예수의 질문에 답할 수 있나. 예수가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의 주라고 진정 고백한다면, 정의 사회, 공공성 회복,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교회의 주요 과제다.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을 강조한 성서에 천착해야 할 한국교회가 오히려 성서를 외면하는 것은 아닌가. 사람들에게 밟히는 맛 잃은 소금이라면, 한국교회는 사회의 적폐다. 이런 적폐를 넘어서려면, 최소한 네 가지는 해결해야 할 선결조건이다. 첫째, 안보프레임 전사로서의 한국 교회상은 극복해야 한다. 둘째, 자본주의 전위대로서의 한국교회상은 극복해야 한다. 셋째, 한국교회의 잘못된 권위주의는 극복해야 한다. 넷째, 예수의 십자가 정신을 사회의 중심에서 실천으로 제시해야 한다. I. 안보프레임 전사로서의 한국교회상은 극복해야 한국사회가 절벽사회로 변했는데 이에 대한 맞섬의 정신이 없다면, 한국교회는 예수를 세상의 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 정의의 관점에서 사회 적폐를 경고하고, 국민을 패거리 정치로 분열시키고, 심지어 약탈 사회를 주도하는 정치인들에게 경고하는 것은 크리스천의 중요한 착한 행실 중의 하나이며 때로는 십자가의 길(마 16장 24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교회 리더들이 사회의 근본 뿌리인 정의(justice)가 흔들이고, 거짓말이 난무하고, 약탈사회의 고위험을 직시하지 않고, 안보 선동에 휘말려드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믿지 않는 자의 선동에 이끌린 한국교회의 리더십이 하나의 예다. 2003년 어느 날 저녁, 종로 5가 기독교연합회관에 목사들이 모여든 강단에서 조갑제는 기독교인이 아니라면서 한 자연인이자 대한민국 국민으로 교회를 향해 성서적인 사명감을 충동했다는 김지방의 지적은 음미할 만하다. 그가 요약한 조갑제의 말은 이렇다.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공산주의는 기독교의 적이다. 현재 정권은 그런 공산주의와 결탁하고 있다. 공산주의와 맞서야 할 우파, 우익에게는 지금 힘이 없다. 정치적 힘도 없고 금전적인 힘도 없다. 교회에는 힘이 있다. 금전적인 힘도 있고, 수십만 명을 동원할 수 있는 정치적 능력도 있다. 교회가 나서서 나라를 구해야 한다.”(『정치하는 교회 투표하는 그리스도인』 116쪽). 조갑제가 어떤 성서의 근거로 적폐의 중심인 패거리 정치에 한국교회를 동원하고, 한국교회를 극우 진영의 들러리로 만들었을까. 한국사를 보자. 조선을 몰락시킨 것이 패거리 정치의 폐해 아닌가. 한기총은 공산주의의 심각성도 다루고 파당정치의 폐해를 경고해서 한국사회와 정치의 평형수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한기총은 극우파 조갑제를 연사로 초청한 이유가 어떤 성경의 원리에 기댄 것인지 한국교인들에게 설명해야 할 것이다. 당시 한기총의 미숙함은 한국교회를 자폐환자처럼 매카시즘(McCarthyism) 사회악의 도구로 만든 것이다. 매카시의 안보프레임은 역사상 소크라테스 재판에서도 나타난다. 31개 그리스 도시국가연합이 페르시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그리스 도시국가의 주도권은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서 벌어졌다. 이 전쟁은 펠로폰네소스 전쟁(431BC~404BC)이며 여기서 스파르타가 승리하고 전쟁에서 패한 아테네의 많은 시민들은 전 재산을 잃게 되며 자살을 하거나 망명을 한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인들 중에 소크라테스를 포함 3천명에게만 스파르타 시민권이 주어진다. 그러나 얼마 후 아테네는 해방된다. 해방의 조건은 친일파처럼 스파르타의 부역자 노릇한 아테네인들을 징계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부역자 척결은 인간사 아닌가. 아테네 지도부는 전쟁 패배의 원인을 논의한 후 소크라테스를 고발한다. 아테네인들이 신들의 거주지인 올림포스 신전을 중심으로 국민들을 결집했는데 소크라테스가 방해한 것이 죄목이다. 소크라테스가 안보프레임의 걸림돌이 된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청년들에게 다이몬, 즉 인간 내면의 소리 또는 양심의 소리를 일깨운 것이 문제였다. 청년들에게 안보가 가장 중요한 것이자 전부인데 그가 청년의 양심을 일깨워 사형언도를 받고 독배를 마셨다. 양심을 일깨운 것이 청년 타락이라는 안보 프레임은 소름 돋는 얘기다. 어느 시대나 권력자들의 음모론에는 반공 프레임이 있는 듯하다. 전쟁의 후유증이지만 소크라테스가 청년들에게 가르친 양심교육이 국익에 해가 된 셈이다. 인류 보편가치인 양심과 국가의 특수가치인 안보는 대립이 아니라 상호 보완관계인데 극우파는 이를 무시하고 안보가 전부인 듯하다. 당시 아테네 지도부의 시각이 한국의 극우 시각과 겹치는 부분이다. 국가의 핵심가치가 사회정의임에도 매카시즘과 같이 안보프레임으로만 사회를 본다면 이는 극우파의 시각이지 성서의 시각일 수 없다. 예를 들어, 대통령으로서 박근혜가 정의를 무시하고 헌법을 어겼다면, 이에 대한 책임을 진지하게 묻는 것이 기독교의 가치이다. 그가 이명박 대통령보다 덜 부패했다는 식의 발언이나, 심지어 작년 5월 제19대 대선에서 유력 대통령 후보가 차기 대통령이 된다면, 한국은 빨갱이 나라가 된다는 식의 근거 없는 무책임한 말을 한다면, 그는 무늬만 기독교 리더이거나 극우파일 것이다. 만일 그런 극우주의자가 소크라테스의 시대에 배심원이라면, 청년의 양심을 일깨운 소크라테스를 어떻게 판결할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안보 검증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어느 정부든 정의가 사회의 토대다. 국민이 박근혜에게 대통령직을 위임한 것은 헌법을 무시하거나 헌법위에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법의 테두리 내에서 행정 권한위임이다. 그러나 그는 온갖 헌법을 어겼다. 2017년 2월 23일 평택샬롬나비 시국토론회 <최순실국정농단과 민주주의의 회복>에서 박종운 변호사가 대통령으로서 박근혜가 어긴 헌법과 법률은 실로 엄청나다. “국민주권주의(헌법 제1조) 및 대의민주주의(헌법 제67조 제1항), 법치국가원칙, 대통령의 헌법수호 및 헌법준수의무(헌법 제66조 제2항, 제69조), 직업공무원제도(헌법 제7조), 대통령에게 부여된 공무원 임면권(헌법 제78조), 평등원칙(헌법 제11조), 재산권 보장(헌법 제23조 제1항), 직업선택의 자유(헌법 제15조), 국가의 기본적 인권 보장 의무(헌법 제10조),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사적자치에 기초한 시장경제질서(헌법 제119조 제1항), 언론의 자유(헌법 제21조) 등 헌법 규정과 원칙에 위배하여 헌법질서의 본질적 내용을 훼손하거나 침해, 남용하였다. 또한 박근혜 대통령은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법률위반(뇌물)죄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 관한법률 제2조 제1항 제1호, 형법 제129조 제1항 또는 제130조),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형법 제123조), 강요죄(형법 제324조), 공무상비밀누설죄(형법 제127조) 등 각종 범죄를 저질러 법률의 규정에 위배하였다”고 박종운은 지적한다. 교회 리더들이 안보에는 목숨을 걸면서, 성서의 관심인 사회정의에는 무관심할까. 오늘의 상황에서 안보와 사회정의는 보완관계인데 극우파는 안보를 절대시한다. 그러나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는 안보가 아니라 사회정의 문제다. 대선 당시 태극기집회를 이끈 주도층은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면 한국을 북한에 받칠 인물로 인식하고 반 촛불집회로 이끌었다. 일부 영향력 있는 기독교 리더조차 안보프레임으로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의 실체를 드러내지 못하게 막기도 했다. 교회 리더들은 진영논리의 전선구축으로 교인들을 우매하게, 한국사회를 더욱 피폐화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계속)
한국교회는 사회의 적폐인가?
한국교회는 사회의 적폐인가?
[정치닷컴=조종건] '한국교회는 사회의 적폐'인가라는 질문은 상당히 자극성 있는 질문이다. 이런 주제를 다룬다는 것은 사회 속에서 한국교회의 정체성에 그만큼 심각한 기로에 서 있다는 얘기다. 한국교회가 사회의 적폐라고 할 때, 그 적폐란 오랫동안 뿌리가 깊어진 죄(a long-rooted sin)를 말하는데 한국교회가 사회악이란 말인가? 이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설립자 예수의 가르침에 세밀한 관찰이 요구된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쓰레기가 되듯, 교회가 사회 속에서 교회다운 기능을 못한다면, 교회는 사람에게 밟히는 소금처럼 사회적폐의 대상이 된다. 예수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the salt of the earth, not the salt of the church)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때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a basket)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어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장 13절-15절)고 가르쳤다. 마하트마 간디가 예수의 가르침인 성서로 돌아가지 않는 크리스천들의 삶에 권하는 대목이 있다. “나는 예수를 사랑한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디는 예수의 가르침이 인류가 가진 가르침 중에서 가장 위대한 가르침이라고 믿었고, 특히 예수의 “산상수훈”(마5-7장)을 그 중에 최고로 꼽았다. 간디의 비판처럼 사회에 대한 교회 역할의 관점에서 한국교회가 성서에 기대고 있지 않다면, 한국교회는 사회의 적폐다. ‘성경으로 돌아가라’는 종교개혁의 핵심사상도 교회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이며 본 글은 사회 속에서의 교회정체성이란 맥락에서 읽고자 한다. 과연 한국교회는 사회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성서에 기대고 있는가? 그렇다면, 다음 질문에 솔직해야 할 것이다. 예수는 교회의 주인가, 세상의 주인가.예수는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의 주권자라고 크리스천은 고백한다. 그렇다면, 교회가 많을수록 예수가 세상의 주가 되신다는 사례들이 많아야 하는데 그럴까. 초기 한국교회 리더들이 한국 초대교회의 좋은 전통인 교육, 의료, 사회복지를 통해 예수가 세상의 주인임을 실천한 것처럼, 오늘의 교회 리더들은 성서에 기댄 정책으로 한국인의 삶의 질을 높인 사례들이 많을까. 불공정과 부패를 막고,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치를 실현하는 데 교회 리더들의 역할이 있었는가. 종교사회학자 정재영과 신약신학자 김세윤을 통해 한국교회 현상을 보자. 첫째, 정재영은 한국교회 리더들이 예수를 세상의 주로 인정했는지 진지하게 의심한다. “사회생활을 하는 공간은 그 자체의 논리와 기제에 따라 작동하고 있으며, 여기에 기독교 신앙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기독교 신앙은 식사 전에 기도를 한다든지, 술 담배를 금한다든지 하는 개인의 사사로운 경건 생활의 영역에서만 영향력을 발휘할 뿐이다. 그리하여 기독교 정치인은 조찬기도회는 열심히 하지만 정치판은 정치 논리대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할 뿐 기독교 정신을 어떻게 실현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한다. 기독교 경제인은 아침 경건의 시간은 갖지만, 자본의 논리에 짓눌려 여느 기업인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를 착취하고 세금을 탈루하기도 한다......,이제까지 한국의 개신교는 교회와 사회의 관계에 대해서 지나치게 이원론적 사고방식을 견지해왔다. 곧 교회 안에서의 생활에 일차의 중요성을 부여하고 일상생활의 영역에 대해서는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아, ‘죄악이 가득하고 썩어 없어질 세상’으로 치부해온 것이 사실이다.”(『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묻다』345-364쪽). 그는 또 “현대사회에서 종교의 사사화(privatization) 경향은 설교의 주제를 개인의 안위와 행복, 마음의 평안에 대한 내용으로 축소시키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 사회에서 종교 활동은 사회 활동의 근거가 되기보다는 자신의 입신출세나 개인의 영달을 추구하는 수단이 되어버렸다(『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묻다』364-365쪽). 둘째, 김세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샬롬’이 실종됐다는 것을 심각하게 지적한다. “한국에서 30년 이상 지속된 군사 독재 기간 동안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서 민주화 투쟁을 하여 인권이 크게 신장되고 민주적 체제가 설립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의 기간 동안 절대 다수의 보수 교단들의 지도자들은 오히려 압제자들의 사제 노릇하며 민주화 투쟁을 억압하기에 바빴다. 오늘날 교계의 ‘지도자들’의 행태는 더 악화된 것 같다. 기독교를 과시적으로 표방하는 정치인들, 관료들, 기업가들이 더 늘었으나 그들로 인하여 자유와 정의와 평화가 확대되어 사회가 맑아지고 따듯해지기는커녕 도리어 민주화가 심각히 후퇴하고, 부정부패가 더 악화되었으며, 불평등 구조가 고착되었고, 갈등이 증폭되어 기독교가 세상의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서에 나타나는 바리새인들 같이 경건 주의적 소극주의에 빠져서 자신의 몸 하나 정결하게 유지하는 일에만 관심을 가진다(『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묻다』23쪽). 김세윤은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회복보다 치유행위에 집착하는 한국교회의 심각한 신학 빈곤을 성서에 기대지 않는 것으로 본다. “성령의 힘을 그저 신비스러운 마력쯤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의 현재적 실현이요 시위로 하신 치유 행위들을 제대로 이해할 리는 없다. 예수가 하신 몇 가지 축사와 육신의 병고 제거의 형태의 치유를 그들의 탁월한 시의성 때문에 클로즈업시키지만, 사실 복음서에서 예수가 가장 많이 하신 치유의 형태는 죄인들을 사탄의 나라에서 불러내어 하나님 나라로 회복시킨 것이다(참조, 막2:17 병행: 눅 15:1-32; 눅 19:1-10 등). 그들은 오로지 전자의 행태의 치유만 치유로 보고 성령의 힘을 빌려 그것을 행하고자 애쓴다. 그들은 수백만의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죄인 하나, 수많은 사람들을 고문하고 죽이는 독재자 하나, 전 세계를 경제공항으로 몰아넣은 월스트리트의 맘몬 우상숭배 탐욕 자들 몇, 전 세계의 젊은이들의 영혼을 타락하게 하는 할리우드의 퇴폐문화의 아이콘 몇, 돈 많이 벌기 위해 관리들에게 뇌물 주고 부실 건물이나 발암물질 뿜어내는 공장을 지어 수십, 수백 명이 목숨을 잃게 하는 우리 교회의 장로, 집사 사업가들 몇 등을 회개시켜 하나님의 통치를 받도록, 그리하여 진정으로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 00 기도원에서 말기 암 환자 수십 명을 안수기도로 치유하는 것보다 더 큰 치유 사역이요 생명 살리기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신학적 사고 능력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묻다』29-30쪽). 심지어 한국교회가 선교의 지상명령조차 성서와 달리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통치에는 관심 없고 오직 영혼 구원만의 편협성을 김세윤은 지적한다. “많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선교 명령을 영혼 구원을 얻도록 하라는 것으로만 이해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통치를 받도록 하는 것,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순종하여 하나님 나라의 샬롬을 실현하고 확대하는 일을 하도록 하는 것도 포함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교회가 자유, 정의, 평화, 환경적 문화적 건강 등을 도모하는 일을 하는 것을 두고 교회가 영혼구원만 해야지 사회참여, 정치참여, 문화운동 등을 하는 것은 교회 본연의 임무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배격하는 것이다(『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묻다』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