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사회로 가는 길-신뢰와 공평

기사입력 2019.02.13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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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사진=이창기 대전대 행정학과 교수]


 


[정치닷컴/휴먼리더스=편집국]

광화문 촛불은 국민이 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역사적 계기였다. 정부가 무너지면 나라를 잃는다는 뼈아픈 경험 때문에 어떤 정부들은 정직하지 못했지만 믿고 따라왔다. 그 길만이 분단 상황에서 이 나라와 국민의 안전을 도모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의롭지 못한 박근혜정부는 권력을 남용하고 거짓과 조작을 일삼으며 국민을 능멸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더 이상 지켜만 볼 수 없었던 국민들이 그동안 유보해왔던 주권을 돌려달라고 외친 것이다.

 

바야흐로 촛불혁명을 통해 국민주권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모처럼 되찾은 주권을 제대로 행사하기 위해서는 시민의 정의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시민의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한국인들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한국사회가 불공평하다는 인식 때문이다.

 

그래서 문재인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기회가 평등하고 절차가 공정하며 결과가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우리 사회가 불공평하다고 느끼고 있는 국민들은 문대통령의 취임사에 크게 공감하며 비록 정치적 수사에 불과할지라도 그 방향성에 큰 박수를 보내고 있다. 정의로운 사회는 누구나 꿈꾸는 우리 모두의 이상이다. 심지어 총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전대통령도 ‘정의사회구현’을 국정 제일 과제로 삼았을 정도이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의에 목말라있는가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그렇다면 정의가 힘인가 아니면 힘이 정의인가? 참으로 오래된 논쟁거리이지만 지금도 이 논쟁은 끝이 안 보인다. 어떤 사건이 사필귀정으로 결론 나는 걸 보면 정의가 힘인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사건의 경우, 악한 사람이 잘 먹고 잘사는 걸 보면 힘이 정의인 것 같기도 하고 헷갈리는 게 현실이다. 너무 빠른 결론 같지만 정의도 힘이고 힘도 정의다. 다시 말하면 힘이 뒷받침되지 않은 정의는 뜬구름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정의가 뒷받침되지 않은 힘은 언젠가 폭력으로 변질되게 마련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정의를 ‘올바름’으로 이해하는 편이다. 이는 서양의 저스티스(justice)라는 개념을 동양에서 받아 들였을 때 유학의 관점에서 ‘인간이 마땅히 행해야 할 올바른 도리“를 의미하는 정의로 번역한 때문 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정의란 실제 현장과는 거리가 먼 관념적 상태에 머물러 있게 마련이고 늘 목말라하는 이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어찌 보면 인간세상에서는 영원히 실현될 수 없는 가치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이 동양에서 아니 한국사회에서 정의에 대해 회의하고 혼란을 느꼈던 이유가 아니었나 싶다. 그런 점에서 정의를 힘과 도덕 사이의 역학관계로 파악하는 서양에서는 정의가 살아 있는 실체이며 쟁취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이처럼 정의를 힘과 도덕의 역학관계 속에서 파악할 때 정의는 작동되고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 실제 우리가 마주하는 정의의 실체가 무엇이든 그것은 힘과 도덕이 서로 대결을 벌이며 형성되어온 유동적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크기변환]5당 원내대표 회동(2).JPG

[사진=국회]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늘 권력과 분배와 평등의 문제가 갈등의 중심에 서있게 마련이었고 오늘도 크게 다를 바 없다. 누가 더 갖느냐 아니면 누가 더 양보하느냐의 문제로 다투고 타협하는 가운데 사회는 그럭저럭 굴러 온 셈이다. 물론 타협이 불발되면 갈등과 전쟁이 벌어지고 거기에서 수많은 희생자가 나오게 되는 구조였다. 따라서 지구상에 더 이상의 희생을 가져 오지 않기 위해서 시민들이 깨어 있어야만 한다. 만약에 시민들이 자신의 생계걱정에 매몰되거나 자신만의 이기심충족에 안주해버리면 그런 사회는 시민이 주인이 아니고 정치지도자들이 군림하는 중우정치가 가능해진다.

 

중우정치가 판치는 사회에서의 시민은 조작의 대상이고 한낱 노예에 불과하다. 정치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켜나가기 위해 시민들이 계속 미의식의 세계에 머물기 바라고 적당히 갈등을 조장하면서 헛된 꿈에 매달려 인생을 소비하게 만든다.

이런 헛된 꿈을 깨뜨리고 시민의식을 높이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목표에 대한 합의와 시민성의 회복, 그리고 시민교육의 방법들에 대한 진지한 고뇌가 수반되어야 할 때이다. 적어도 깨어 있는 시민이라면 공동체의 신뢰를 구축하고 공평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결국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정의로운 사회는 다름 아닌 정부와 국민이 서로 신뢰하고 매사가 공평한 사회를 만드는 것인 만큼 깨어있는 시민과 명예를 중시하는 공무원이 협력하면 정의로운 대한민국이 가능하다.

 

최근 글로벌 경제위기 속에서 경제 살리기가 한국사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인 것처럼 비쳐지고 있다. 물론 경제가 어렵다보니 비중이 큰 건 사실이나 한국사회가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그에 못지않게 사회질서를 확립하고 정직하며 신뢰할 수 있는 사회를 구축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과제다. 몇 년 전 한국개발연구원의 발표에 따르면 한국경제성장률에 있어서 1%포인트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게 사회기초질서의 붕괴와 신뢰의 상실이라는 지적은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다시 말하면 사회질서의 확립이 전제되지 않은 경제성장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

 

그나마 우리나라는 경제위기를 잘 극복하여 국민소득 2만 불을 넘어서게 되어 선진국의 4개 기준을 전부 충족하게 되었다. 4개 기준이란 첫째 IMF 분류기준에 부합해야 하고, 둘째 OECD 회원국이어야 하며, 셋째 인적개발지수가 0.9이상이고, 마지막으로 국민소득이 2만 불을 넘어야 하는데 국민소득 2만 불을 넘어섰으니 세계에서 24번째로 네 가지 기준을 모두 충족한 선진국이 된 것이다.

 

그러나 위의 네 가지 조건은 경제지표에 치중되어 있어서 네 가지 조건의 충족 만 가지고 대한민국을 자신 있게 선진국이라고 부르기엔 뭔가 캥 기는 구석이 없지 않다. 바로 우리나라의 사회지표는 여전히 미흡하기 때문이다.

 

사회지표란 복지수준이나 사회적 자본, 즉 신뢰와 규범의 준수, 네트워크, 자원봉사 등을 의미하는데 경제지표에 비해 여전히 부족하다. 일찍이 제나라의 명재상 관중은 나라를 떠받치는 네 기둥을 예의염치(禮義廉恥)라 했는데, 과연 우리 사회에 예의와 염치가 있는지 자문해 볼 일이다. 예란 영어로 sacrifice, 즉 희생으로 번역되는데 배려와 질서를 의미한다 하겠다. 오늘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이 국민을 위해 얼마나 희생하고 있으며, 사회질서는 잘 지켜지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 게 오늘의 현실이다.

 

의란 신용과 의리를 뜻하는데 정부가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고, 정치인들은 자기를 뽑아준 유권자들에게 의리를 지키고 있는가? 염이란 청렴과 정직을 의미하는데 우리 사회가 투명하고 깨끗하며 정직한 사람들이 대접받는 사회인가? 치란 자신의 잘못을 성찰하며 겸허한 자세를 견지하는 것인데 현실은 어떠한가? 대부분의 한국인은 잘못을 부끄러워하기 보다는 오히려 잘못을 호도하고 잘했다고 억지를 부리지는 않는지? 적어도 선진국이 되기 위한 내부적 조건은 예의와 염치를 세우는 사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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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한국인은 갈수록 불행하다고 느낄까? 가장 큰 원인은 오랜 경제침체에 따른 실업, 소득감소, 청년취업난, 소득격차 등의 경제적인 이유가 큰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더구나 세월호, 메르스, 아동학대 같은 사회불안전요소도 한몫을 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에 못지않게 우리 사회의 불공평한 구조가 행복감을 저감시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국민들이 체감하는 그 불공평함이란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재벌들의 갑질,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정치인들의 막말과 불통, 진경준검사장을 비롯한 고위공무원의 부정부패 등을 말한다. 정치행정권력과 재벌들의 검은 거래의 속살이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국민들의 배신감과 절망감은 깊은 수렁에 빠진 듯 헤어 나오질 못하고 있다.

 

최근 서울 서베이에서는 이처럼 우리 사회의 불공평한 실상을 그대로 반영한 통계가 발표되었다. 우리 사회의 공평성을 부문별로 나누어 ‘우리 사회가 얼마나 공평하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질문했더니 10점 만점에 4.51점을 받아 100점 만점으로 환산하면 50점에도 못미치는 과락점수를 받았다. 부문별로 보면 소수자의 권리가 3.97점으로 최하위를 기록했고, 조세정책은 4.1점, 일자리취업기회가 4.34점, 수입과 지출은 4.39점을 기록해 평균점수 4.51점 보다 아래에 놓여 있었다. 그 다음으로 도시와 농촌의 발전 4.51점, 사회복지 4.68점, 수도권과 지방의 발전 4.75점, 남녀평등 4.77점, 대학교육의 기회 5.07점 등으로 모든 분야가 5점대 미만을 기록했다.

 

그러니 우리 국민들은 우리 사회가 전반적으로 불공평하다고 평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로 인해 더 불행하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사회가 정부와 사회지도자들을 신뢰하지 못하고 모든 기회에서 자신은 불리한 처분을 받고 있다고 느낀다면 그런 사회에 희망도 없고 활력도 없게 마련이다.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투명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작년 9월부터 김영란법이 시행되고 하나 일반 국민들은 우리 사회가 더 투명해질 것이라고 큰 기대를 갖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오히려 편법이 판을 쳐 전 국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만들고 검은 거래의 단가가 더 높아지는 역작용을 낳을 거라고 예상할 정도이다. 정부나 재벌들이 국민의 수준을 따라 오지 못하는 게 우리 사회의 아킬레스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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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청와대]

 

정부는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과 권한을 남용하지 않고 재발은 국민 때문에 부를 축적하고 있다는 고마움을 잊지 않는다면 국민들은 국가발전을 위해 헌신하는 정부와 재벌들에게 박수를 보낼 것이다. 정말 우리 모두가 꿈꾸는 사회는 정직하고 성실하게 땀을 흘리는 사람이 정당한 보상을 받는 그런 사회일 것이다.

 

그럴 때 전국민이 정당한 보상를 얻기 위해 땀흘려 노력하고 이번에 땀흘리지 않은 사람은 그 결과에 수긍하며 다음 기회를 기약하게 될 것이다.

심지어 땀흘리지 않은 사람 중에 장애라든지 특별한 사정이 있는 사람에게는 특별한 사정을 고려하여 배려를 해줄 때 더불어 모두가 함께 행복한 사회에 살고 있다는 자긍심을 갖게 될 것이다.

 

웃음기 사라지고 우울한 대한민국이 새롭게 태어나서 모든 국민을 환하게 웃게 만들고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길은 우리 사회의 중심에 공평함이 자리를 잡게 만드는 것이다.

 

적어도 깨어있는 시민이라면 ‘바람직한 사회’란 공동체에 신뢰가 뿌리내리고 있고 공평하다는 인식이 널리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어야 한다. 

[편집국 기자 infoj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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