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탐방] 삼척사람들의 문화와 몸짓- 삼척 기줄다리기,주민 천여 명이 전통 기줄다리기 시연

열악한 자연환경 극복하려는 지역민들의 숭고한 의지
기사입력 2019.02.15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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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삼척시]

[정치닷컴 강원지부=김지성 국장]

 

삼척시는 기줄다리기를 원형복원 및 재현함으로써 정월대보름제 세시풍속을 계승 발전시키고 시민의 문화 자긍심을 높이는 시민의 대축제로 옛 모습 그대로 부내와 말곡 편을 나눠 주민 천여 명이 전통 기줄다리기 시연으로 정월 보름제의 품격을 한 단계 높이고 있다. 또한, 다양한 예술 공연과 삼척시 관광지 재정비로 2018 삼척관광 방문의 해를 맞아 전 세계 관광객들에게 생태 명품 관광도시 삼척을 널리 날리는 소중한 축제가 되고 있다.

 

줄다리기는 인류의 놀이유산 중 가장 다양성을 내포하고 있다.

줄다리기 화두로 30년 국내답사와 관심, 해외 참관을 수행하였다. 줄다리기는 대동놀이의 유형 중 인류문화 유산으로서 가장 다양한 상징성을 내포한 놀이임을 알았다. 분포하는 지역에 따라 독특한 요소를 반영하지만, 인류의 생존과 행위표출에 대한 보편적 요소를 두루 간직하기에 일찍부터 주요 연구 대상이 되었다. 기줄다리기의 민속학적 성찰은 한국 농경의례와 민속놀이의 저변과 변이, 영향관계 등을 파악하는 데 요긴한 시각이 된다. 강원도 삼척시 기줄다리기는 한국 줄다리기 중 전통사회에서 전승된 대표성을 지니고 있는 민속놀이다.

 

삼척  기줄다리기가  1976년  6월  강원도 중요무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지난 2015년 12월, 전국의 6개 시·군 기줄다리기와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인류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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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은 본래 부족국가시대에는 실직국(悉直國)이라 불리어졌다.

삼척시 향토지인 《진주지(眞珠志)》에 의하면, 서기 92년 고구려 태조 40년부터 실직국이 쇠약하자 102년 여진의 침공으로 패망하여 여진의 세력권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서기 505년에 신라로 회복되었는데, 김이사부(金異斯夫)를 군주로 삼아 통치하였다. 처음 5년에는 북진(北鎭), 경덕왕 19년에는 삼척군이라 하였다. 고려 성종 14년에 척주(陟州)로 개명하였고, 현종 9년에는 삼척현(三陟縣)으로 불리어졌다. 조선 태조 2년에 목조외향(穆祖外鄕)이라 하여 삼척도호부로 승격되었고, 고종 32년에 삼척군으로 개명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삼척지역은 동쪽으로는 동해 바다에 접하고 북쪽으로는 명주군에, 서쪽으로는 정선군에, 남쪽으로는 경북 울진군에 접하고 있다. 곧 서쪽은 태백산맥이 이어지는 산간지대이고, 동쪽은 해안선을 따라 형성된 해안지대이기 때문에 삼척에는 아직까지 특이한 민속이 잔존형태로 전승되는 곳이다.

 

기줄다리기의 등장 시기를 현종 2년(1661)정도까지 거슬러 볼 수가 있다고 김일기(작고)의 추정론이다. 줄의 대동적 노동력은 저수지 제방축조와 배와 그물 다리기 오십천이 있는 삼척읍 고성(古城)주변의 마을들이 전승핵심지역이고 그 외 삼척 주변마을들이 외각전승지인 것이다.기줄다리기의 양편도 고성을 중심으로 나누어지는데 말곡(末谷)과 부내가 그것이다. 이때 말곡은 숫줄, 부내는 암줄이다. 고성과 연결되는 오십천 광장이 연행 장소가 되었다. 오십천 광장은 주로 사대로 사대광장이라 불렀다. 과거에 기줄다리기 장소가 바로 이 곳이다.죽서문화제 때 도시화에 의하여 사대 광장이 없어짐에 따라 기줄다리기는 규모가 축소되어 ‘죽서문화제’의 일부로 학교 운동장이나 길 가운데서 거행되었다.

 

도시계획에 따라 오십천 수로가 변경되었기 때문에 옛날 같은 모습을 재현하기란 힘든 것이다. 근래에는 오십천 둔치와 진주로가 되어 있다가 삼척정월대보름제로 바뀌면서 엑스포광장이 되고 있다.

당진지역의  기지시줄다리기는  길쌈이라고도  하며  농경의례의  부류인 일종의 편싸움 놀이이다. 줄땡기기(경상), 줄당그기(호남)등으로 보아 줄싸움 놀이로 여겨진다. 마을을 육지쪽과 바닷가쪽 두 편으로 나누는데 생산의 의미에서 여성을 상징하는 바닷가 쪽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한다. 줄다리기는 윤년 음력 3월초에 재앙을 막고 풍년을 기원하는 당제를 지낸 다음 행해졌다.

술비통의 복원은 기줄다리기의 존재양상을 가늠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술비통은 줄을 꼬거나 트는 데 필요한 틀이다. 술비통의 어의(語義)에 대해서 이 지역 제보자들이 대부분 줄이 술술 비빔이나 삐져 나옴에 따라 이 기구 내지 구멍빈통으로 나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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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헤....야 술....비.....야...../ 이 줄을 틀어 무엇에 쓰나

이 줄을 틀어 무엇에 쓰나 / 말곡 ․ 부내가 당겨 보세

달도 밝고 명랑한데 / 승부결단을 하여 보세

 이 줄을 틀어 기줄에 매어 / 정월이라 대보름 날

말곡 부내가 기줄을 당겨 / 말곡이 이기면 농사가 풍년

부개가 이기면 해사가 풍어 /국태민안을 기원하세

술비 소리를 잘 하고 보면 / 삼재팔난을 소멸하고

 부귀영화를 점지하고 / 먼 데 사람은 듣기도 좋고

가까운 데 사람은 보기도 좋다.

이 기줄을 보존하여 / 길이 길이 후손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세

 

 

술비통은 삼척 지역민 스스로 인화 단결을 위하여 슬기롭게 발전시킨 예비적 민속놀이인 셈이다.

 

기줄다리기의 양편은 말곡의 숫줄과 부내의 암줄로 나누어졌다. 그 경계는 조선시대 삼척 부읍내 동헌이 있던 성벽을 중심으로 서쪽은 말곡, 동쪽은 부내로 나누어졌다. 말곡은 주로 성북리, 읍상리, 등봉리, 원당리, 성남리 그리고 미로면(未老面), 북평읍 등에 속해 있었다. 부내는 당저리, 남양리, 사직리, 정상리 그리고 근덕면 마을들, 원덕면 마을들 등이 속해 있었다.말곡은 주로 산간 마을들일 뿐만 아니라 농사를 주업으로 하던 지역이다. 반면 부내는 해안지역이라 어업이 번창하던 지역이다. 그래서 삼척에서는 말곡 쪽을 영서 또는 영세로, 부내 쪽을 해변 또는 해부로 불렀다. 이 경계의 유래는 기줄다리기의 기원과 같이 확실하지 않다. 다만 구전과 문헌에 나타난 지명의 추정으로 알 수 있을 뿐이다.

 

매년 정월 10일 전후하여 말곡 부내에서 각각 총대표 패장을 이른바 민선에 따라 추대하게 된다. 뽑힌 총패 장은 덕망, 재력, 풍모 등을 고루 갖춘 인물로 마을민이 숭상하는 사람이다.마을의 위기에서는 이 패장을 중심으로 뭉쳤다고 한다. 그는 민중의 주체성을 대표하며 집단 민속놀이의 총괄자이기도 하다.

참모들이 구성되면 총패 장은 그들이 속한 패집단에 지시를 하게 된다.각 마을에 술비통으로 기줄을 만들어 보름날 아침까지 본부에 집결하라고 통지한다. 통지를 받은 마을은 이장이 중심이 되어 집집마다 짚을 모으고 술비통에 의해 기줄을 만든다. 기줄은 보통 직경 40~50cm 정도, 길이는 80~100cm로 만든다. 각 마을마다 만들어진 기줄은 마을 민들에 의해 보름날 아침 어께에 메고 본부(읍내 사대 광장)에 집결하게 된다. 각읍면 패장이 줄 머리인 마두(馬頭)에 올라타고 60~80개 모여 암숫줄을 형성하였다. 그 무게는 100톤이 될 것이라고 추정된다. 실제로 최종 기줄의 머리가 초가집 높이였다고 하니 기줄다리기의 대규모성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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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줄다리기에는 다양한 속신이 내재되어 있다. 속신 연구가 체계적이지 못한 탓에 줄다리기와 속신의 관련성 역시 깊이 있는 논의가 되지 못했다.기줄다리기의 속신 체제에는 점복, 예언, 주술 등이 내재되어 있다. 줄다리기 관련 대표적인 속신사유는 용신(龍神)의 상징과 이에 따른 믿음이 공통으로 반영하고 있다.

삼척시 기줄다리기에는 삼척 사람들의 가꾸어온 문화양식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마을 굿과 거리굿 형태인 동시에 패싸움 위주의 겨루기다. 생태계에 적응하려는 몸짓과 참뜻이 꿈틀대고 있다.

 

이장식 세명대학교 교수, 문화재위원은 "삼척 기줄다리기는 정월대보름 세시행사의 대동놀이였다.기줄다리기의 문화적 토대에는 ‘마카’미쳐 빠지는 신바람과 여럿이 으랏차차의 공동체 지역문화가 있다. 열악한 자연환경을 극복하려는 지역민들의 숭고한 의지가 담겨 있다.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힘을 보태고 두레의 울력이 보릿고개를 넘기듯 고난을 이겨낸 슬기로움이 있다.공동체 조직의 승리인 셈이다. 일상의 흩어진 인심을 수습하고 하나가 되어 실컷 놀기에 꿩 먹고 알 먹는 식의 행복감이 있었다. 대규모의 놀이로 하나 되는 경험은 전통사회에서 엄청난 깨달음을 느끼게 했을 것"이라고 전하기도 했다.

[편집국 기자 infoj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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