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과 둔함의 미학

기사입력 2018.06.16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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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글= 이혁]


 

‘천년 묵은 지네’

나무꾼 총각이 산속에서 길 잃은 처녀를 하나 데려와 아내로 삼은 후 집안의 어려운 일이 모두 해결 되고 살림도 많이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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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여자가 자기 혼자 석 달 동안 방 안에 있을 테니 아무도 들여다보지 말라고 말했고 그 말이 지켜지면 가세가 날로 흥할 것이지만 반대의 경우 큰 재변이 일어날 것이라 했다. 나무꾼은 노력했지만 마지막 하루를 참지 못했다. 창구멍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여자는 없고 대들보만한 지네 한마리가 있었다. 


그때 벼락이 치고 집이 무너졌고 얼굴이 흉하게 변한 여자가 나타나 말했다. 나는 천년 묵은 지네다. 내가 석 달 동안 홀로 비밀한 시간을 보냈으면 완전한 사람이 되어 너와 행복하게 살았을 터인데, 네가 분별이 없어 이 일을 망쳤다. 여자는 사라지고 나무꾼은 옛날의 가난한 신세로 다시 돌아갔다.


 

 

‘바그너의 오페라 로엥그린’

브라반트 공국의 공녀 엘자는 위기의 시간에 백조가 끄는 작은 배를 타고 나타나 자기를 구해주고 자기와 결혼하게 되는 백조의 기사에게 그의 출신지와 이름과 혈통을 묻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악한 자들의 꼬드김과 자신의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이 금기를 깨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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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자는 무엇보다도 기사의 괴력이 흑마술에 의한 것이 아니란 사실이 증명되기를 바란다. 기사의 이름은 로엥그린이며, 먼 나라의 성배가 숨겨져 있는 아름다운 성에서 왔다. 그는 성배의 은혜로 초인적인 힘을 얻는 기사임을 이렇게 알릴 수 있었지만 범인들이 알아서는 안 되는 거룩한 보물의 존재를 또한 이렇게 세상에 폭로할 수밖에 없고, 또 폭로하였기에 더 이상 브라반트에 남아 있을 수 없다. 


그는 공국을 환란에서 구하고 그 통치권을 바로 세우지만, 엘자를 남겨두고 또다시 먼 나라로 떠난다. 엘자는 슬픔에 잠겨 숨을 거둔다.


 

 

 

굳이 알려하지 않거나, 모르는 게 약인 경우를 우리는 경험하며 세상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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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알려고 하지 않아도 살다보면 자연히 알게 되는데 조급함으로 일을 그르치고,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일이 적지 않다. ‘천년 묵은 지네’의 구화나 ‘로엥그린’의 신화를 떠올리며 부모와 자식 간, 부부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그냥 믿고 신뢰하는 태도, 때로는 알고서도 모른 척 굳이 미리 조급하게 알려하지 않는 둔함의 미학도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 보게 하는 요즘이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너무 급하고 빠르다. 급할수록 돌아가라, 은인자중(隱忍自重: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참으며 신중하게 행동함), 도광양회(韜光養晦:자신의 재능을 숨기고 인내하며 때를 기다린다)등의 지혜가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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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대한민국은 좀 지나치다싶게 빨리 돌아간다. 우리 민족의 장점인 역동성, 순발력이 단기간에 괄목상대한 발전을 이루는데 기여한 품성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홍수처럼 매일 넘쳐나는 뉴스·폭로 등을 접하면 때론 느리게, 때론 둔함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혁

 

베이스 바리톤 이혁

전 비엔나 국립오페라단 단원

 

현 개신대학원대학교 외래교수

[편집국 기자 infoj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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