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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닷컴=이건주]“달포 전에 서울로 압송돼 조사를 받고 용산 군사령부 군법회의에 부쳐졌던 적괴(賊魁) 강기동은 (중략) 보병 65연대 병사 3명으로 하여금 포형(砲刑:총살형)을 거행케하였는데 불과 한 발에 왼쪽 이마를 관통하여 봄풀의 한 점 이슬이 되었다더라” 1911년 4월 19일자 매일신보 기사 ‘강기동의 포형’ 중 일부다.
[사진=강기동선생.국가보훈처]
강기동 선생은 1884년 서울 명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후 일본군 헌병보조원으로 발탁돼 경기도 양주군에 위치한 고안헌병분견소에서 근무를 하게 된다.
이때 의병 2명이 일본 경찰에 붙잡혀오자 강기동 선생은 이들을 탈주시키고 본인도 의병장 이은찬(1878-1909)이 이끄는 의병부대에 들어갔다. 이후 경기도 포천, 양주 등지에서 활약을 했다. 당시 일본 군부가 강기동 선생에게 500원이라는 큰 현상금을 내걸었을 정도였다.
1909년 9월부터 시작된 ‘남한대토벌’ 작전을 피해 북간도로 이동하던 강기동 선생은 결국 1911년 2월 함경남도 원산에서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고 만다. 이어 서울에서 조사를 받고 용산 군사령부 군사재판에 넘겨졌다.
당시 선생은 일본군 ‘위수감옥’에 수감됐던 것으로 보인다. 1909년에 만들어진 위수감옥은 서대문형무소와 달리 군형법을 어긴 일본 군인, 군속들을 가두기 위해 만든 시설이었다. 즉 일제는 선생을 군속(헌병보조원) 신분으로 처벌했던 것이다. 감옥은 지금도 용산 미군기지 내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선생의 재판에는 아카시(明石) 조선총독부 경무총장을 비롯한 거물급 인사들이 두루 입회했다. 아카시는 의병탄압과 무단통치의 주범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일본군에 의해 28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한 강기동 선생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된다.
용산구 관계자는 “지난 2017년부터 구 소식지에 용산기지의 역사문화유산을 매달 한 꼭지씩 소개해 오고 있다”며 “이번 글은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특별히 기획한 것”이라고 말했다. 구 소식지는 매달 6만 4500부 발행된다. ‘용산기지의 역사’는 독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연재물의 하나다. 지난 2017년부터 현재까지 기지 내 문화유산과 자연물 18곳을 소개했다. 인물 소개는 이번이 처음이다.
연재를 이어오고 있는 김천수 용산문화원 역사문화연구실장은 “당시 신문기사를 통해 강기동 선생의 최후를 새롭게 그려봤다”며 “선생 외에도 많은 한국인들이 위수감옥에 수감됐을 가능성이 있다.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성장현 용산구청장은 “강기동 선생은 후손도 남아있지 않다”며 “용산에서 최후를 맞이한 애국선열인 만큼 우리 구민들이라도 선생의 아들딸이 되어 그를 영원히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