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스토리 산방(山房) 이야기] 당연하게 일어나는 모든 것들 공감 하지 못하고 분별하고 판단하려 한다

기사입력 2019.06.03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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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닷컴/휴먼리더스= 정무공 글.사진]

[북한산 청학사 주지/안흥사 총무]

 

 

그렇게 아름답게 수놓은 꽃들도

시간을 거슬러 있을 수 없고

 

그렇게 향기로운 꽃 내음도

바람 따라 흐르며 사라지니

 

언제 왔다가 언제 갔는지

인사도 없이 사라지네.

 

나무에는 꽃의 흔적이 없고

허공에는 향기의 흔적도 없네.

 

우리의 삶도 꽃과 같으니

이것이 바로 무상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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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아 꽃향기로 가득하여 벌들 소리가 한창이다. 아카시아 꽃에서 꿀을 모이기 위해 벌통을 산 중턱에 설치하니 벌들이 요란스럽게 날아다닌다. 꽃이 있는 곳에 나비가 있다고 하는데 지금은 벌이 더 많다. 물론 지금도 나비가 있지만 나비는 가을에는 훨씬 많이 찾아온다.

 

아카시아 꽃들이 마치 포도송이가 달려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팝나무 꽃이 지고 아카시아 꽃이 바통을 이어 받았다. 길가에는 데이지 꽃이 풍성하게 피어있고 바위틈에는 돌나물 꽃이 넓게 펴져있다. 산에는 재미있게도 마라톤 하듯 꽃들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 덕에 눈과 코는 호강을 한다. 그러나 꽃들은 안타깝게도 오래가지 않고 금방 지고 만다. 이럴 때 화무십일홍(花無十一紅)이란 말이 생각난다. 열흘 붉은 꽃은 없다는 뜻으로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십일을 넘기지 못한다고 한다. 또한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란 아무리 막강한 권력도 십년을 넘기지 못한다고 하여 둘 다 무상(無常)을 뜻한다. 꽃들이 질 때면 언제나 우리에게 다양한 가르침을 주는 것 같다.

 

중국 속담에는 인무천일호 화무백일홍(人無千日好 花無百日紅)이란 말이 있다. 사람은 천일동안 한결같이 좋을 수는 없고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백일동안 붉게 피지는 못한다. 언제나 항상 할 것 같았던 것들은 아쉽게도 금방 사라지고 그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무상의 진리는 변함이 없다. 온 것은 반드시 서서히 변하여 사라지기 마련이다. 다만 그 과정 속에서 우리의 마음은 가장 아름다웠던 그 때를 기억하며, 마음속에 그대로 붙잡아두고자 하는 갈망이 있다. 그러나 사라져버린 후에는 아쉬움이 되고 추억이 되어 다음을 기약한다. ‘내년에는 또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을 볼 수 있겠지하면서 아쉬움을 달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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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좋은 사람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 가끔 본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하겠지만, 함께 산다면? 답은 독자들에게 돌리도록 한다. 너무나도 좋아서 함께 무언가를 하게 된다. 그 시작은 참으로 아름답고 좋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소소한 것들이 일어나도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던 어느 순간 좁혀지지 않는 무언가가 그들 사이를 위협한다.

 

이해되지 않는 접점이 생기게 되면 그 때부터 서로간의 주장을 이해시키려 노력하며,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게 된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바꾸려하기 때문에 결코 서로가 서로를 물러서지 않게 만든다. 그러면서 그 문제를 풀기보다는 그저 덮고 넘어가는 것이 서로에게 더 이상 상처주지 않을 것이라 타협한다. 하지만 언젠가 또다시 그 문제가 일어나면 서로의 감정을 상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좋아서 시작하게 된 관계, 즉 연인, 친구, 일 등 함께 하는 모든 것들이 항상 좋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무상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꽃이 피는 것은 우리가 태어나는 것이며, 꽃이 지는 것은 우리가 죽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벌과 나비들이 찾아와 꿀을 가져가고, 각종 벌레들이 줄기를 타고 잎으로 꽃으로 다니며 힘들게 한다. 또한 바람이 불고 비가 오며, 햇볕이 내리쬐는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며, 꽃이 시들 기도 전에 떨어지기도 하고, 기온이 급변하여 금방 지기도 하며, 온갖 원인으로 인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이러한 과정은 곧 우리네 삶이며,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깨달을 것인가?

 

무상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무상함을 알아차리며 살지는 않는다. 무상함을 잘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자세히 관찰하고 살펴보아야 한다. 어떻게 변화하고 사라지는지를.

 

어떠한 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언제나 분별하고 판단하려 한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보면 공감보다는 분별하여 판단해주기 바쁘다. 어떤 것은 잘했고, 어떤 것은 잘 못했고, 이것은 좋은 것이며, 이것은 나쁜 것이라면서 결론까지 지어주기에 바쁘다. 그렇게 이야기하다보면 판사들만 있다. 아! 내가 지금 재판을 받으려고 이야기를 했나? 그래서 사람들이 질문을 하지 않으면 그저 듣고만 있어도 편안할 때가 있다.

 

이야기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이렇게 하라고 답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답이 정답인지 오답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해답을 듣고 싶은 이들에게는 큰 위안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이야기를 할 때 가장 큰 위안은 공감이지 답을 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답은 스스로의 마음속에 이미 정해두고 있을 때가 훨씬 많다. 단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 확인하려 이야기를 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판사역할을 잠시 멈추고, 상대를 공감해야한다.

 

첫 번째로 꽃은 우리에게 공감을 하게 해준다. 꽃을 보면서 우리는 표현을 한다. ‘이쁘다’, ‘아름답다’, 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얼굴의 표정으로 공감을 표현하기도 한다. 있는 그대로를 느낀 것을 되돌려 준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생각으로 분별하여 판단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느낀 것을 표현할 뿐이다. 이렇게 상대방이 힘들어하면, ‘힘들구나’,하고 슬퍼하면, ‘슬프구나’, 좋아하면, ‘좋아하는구나’, 하고 공감을 해주는 것이다. 여기에 ? 무엇 때문에? 누가?’ 하는 등의 따지는 말들은 오히려 공감을 방해한다.

 

분별심을 멈추면 공감하기가 훨씬 쉽다. 힘들어할 때 누군가 힘들지하는 말 한마디에 위로가 되고, ‘힘내세요라는 말 한마디에 용기를 낸다. 생각을 말하는 것은 쉽지만 감정을 표현하는데 익숙하지 않은 우리에게는 이런 공감이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연습을 통해 우리는 자연에게 공감하는 것처럼 주위의 사람들과 모든 것들에게도 공감을 해보자.

바로 이 공감을 통해서 무상함을 더 절실히 느낄 수 있지는 않을까? 평소에 공감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무상함을 잘 느끼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저 당연하게 스쳐지나가고 일어나는 그 모든 것들에 우리는 공감을 하지 못하고 있다. 공감을 한다면 작은 것 하나 하나 변화하고 있고 그로인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모든 것들이 무상하다는 것을 공감한다면 우리의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눈은 밝고 지혜로워질 것이다.

 

두 번째로 꽃이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는 방법은 바로 상실이다. 꽃이 지고 나면 우리는 찾게 된다. 언제 떨어졌는지 모르게 없어졌기 때문이다. 상실의 아픔은 우리를 힘들게 한다. 다만 꽃은 우리가 집착하는 마음을 깊이 두지 않기 때문에 잠깐의 상실을 경험할 뿐이다. 그러나 소중한 것의 상실은 우리로 하여금 큰 괴로움을 준다. 그 이유는 영원했으면 하는 바람이거나 영원할 것이라는 마음 때문이다. 무상함을 알지만 우리의 마음은 항상 그랬으면 하는 마음이 더 간절하여 무상을 잊고 살아간다. 그러나 상실이 찾아오면 우리는 크게 괴로워하며, 깨닫게 된다. ! 무상하구나. 원래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아픔과 슬픔과 괴로움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때에 우리의 마음은 평온해짐을 느낀다. 고요함과 평온함이 우리의 마음에 가득할 때 우리는 무상에 대해서 깊이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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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가족과 같이 친한 도반이 다녀갔다. 왔을 때 너무나도 반가운 마음으로 공감하고 가고 난 뒤 그 빈자리가 나에게는 상실로 다가와 무상을 일깨워준다. 홀로 방에 앉아 차를 마시며 무상을 생각하게 해주는 참으로 고마운 도반이다. 밖을 나갔다가 돌아오면 나를 반겨주던 금강이와 아지, 장군이가 꼬리치며 내려오지 않고 위에서 쳐다 만 볼 때 순간 나의 마음은 어라? 이것 봐라!’ 하다가도 어디가 아픈지, 힘이 드는지, 나이가 들어 귀찮은지 걱정이 앞선다. ‘그렇지! 얘들이 항상 나를 반겨주러 꼬리를 흔들며 뛰어내려 와야 하는 것은 아니지!’ 하면서 무상함을 알아차려본다.

 

 항상 그러한 것이 없다는 것을 매 순간 마음에 일깨워 주는 모든 것들이 바로 스승이 된다. 지금도 모든 것이 변하고 있는 이 무상함을 항상 느껴보자. 그리고 나의 삶에서 무상함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늘 되돌아보자.

[이건주 기자 infoj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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