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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닷컴=조종건]
지난 2월 기고에서 “한국교회는 사회의 적폐인가?(1)”라는 상당히 자극성 있는 질문을 다음과 같이 필자는 제기했다.
한국교회는 사회문제를 다룰 때, 과연 성서에 기대고 있는가? 예수는 크리스천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소금(the salt of the earth)(마태 5장 13절)”이지, 교회의 소금(the salt of the church)으로 가르치지 않았다. 크리스천은 예수를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의 주권자로 고백한다. 그렇다면, 교회가 많을수록 예수가 세상의 주가 된다는 사례들이 많아야 하는데 과연 그럴까?
오늘날 한국교회의 렌즈를 통해 예수의 활동을 보면, 그의 활동 무대가 마치 교회인 것처럼 착각이 든다. 왜냐하면 상당수의 한국교회가 교회의 울타리를 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교인들이 자기 교회만 충성하고 사회 속에서 섬김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하는 목사들도 있다. 1세기 예수의 활동무대가 성전이나 회당에만 국한된 것인가? 예수는 성전과 회당을 사용했지만 오히려 성전을 헐라고 비판했고, 성전과 회당 지도자들을 가혹할 정도로 비판했다.
예수의 진정한 관심은 삶의 자리(Sitz im Leben)다. 예수는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 집에 갔다. 사마리아 수가성에서 삶의 기력을 상실한 여인을 만났다. 예루살렘 베데스다 연못에서 고통과 절망 중에 있는 환자를 만났다.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에서 큰 무리를 만났다. 상당수 한국교회와 달리 그는 성전이나 회당에 머물러 있지 않았고, 그의 활동 중심에는 가나, 수가성, 베데스타, 가버나움, 갈릴리 바다 건너편, 즉 사람들의 삶의 자리였다.
예수를 교회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교회공동체는 예수처럼 삶의 자리를 중시해야 한다. 왜냐하면 리처드 스턴트의 지적처럼 성경은 1,754쪽이지만 ‘정의와 이웃사랑’을 2,000 곳이나 언급했다는 것은 이 주제가 성서의 중요한 가치임을 확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리처드 스턴스,『구멍 난 복음』홍종학 옮김, 41-42쪽). 한국교회 많은 설교내용이나 성경공부가 정의와 이웃사랑에 대해 이상할 정도로 약하다. 심지어 사복음서에 나오는 ‘가난’의 문제를 마음의 가난으로만 해석하는 영지주의 목사들도 있다. 그러니 크리스천 시민운동가들에 대한 교회후원은 상상하기 어렵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많은 교회 리더들이 현대판 영지주의(gnosticism)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에서 경계하는 이단이 영지주의인데, 적지 않은 한국교회 리더들이 현대판 영지주의에 기대는 것은 아닌가. 영은 거룩하고 육은 더럽다는 생각이나 교회는 거룩하고 세속은 더럽다는 것 역시 영지주의다. 목회자와 평신도의 차이를 기능직이 아니라 신분직으로 보는 것도 현대판 영지주의이다. 개인 구원과 같은 영혼구원에만 집착하면서 이웃사랑은 구호에 불과한 것도 같은 현상이다. 중대형교회는 성공한 교회이고 미자립교회는 실패한 교회로 보는 것과 자기 교단만 우월하고 남의 교단을 무시하는 신학생들의 태도도 같은 현상이다. 교인들이 교회 밖에서 기독교시민활동을 하면 눈 밖에 난다는 얘기도 현대판 영지주의 현상이다.
그러니 현실사회 속에서 교회의 가치를 적용하는 것은 미약할 정도 이상으로 사각지대다.
공정한 사회, 신뢰 사회에 대한 관심은 먼 얘기 아닌가. 하나님이 준 자연환경 보호를 교회에서 주도하는 것 또한 상당히 먼 얘기다. 스타필드와 같은 초대형마트로 인한 지역경제 초토화와 같은 경제생태계는 고민의 대상이 아니다. 교회 울타리 안에서의 신앙생활이니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는 예수의 질문에 답할 수 있나.
예수가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의 주라고 진정 고백한다면, 정의 사회, 공공성 회복,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교회의 주요 과제다.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을 강조한 성서에 천착해야 할 한국교회가 오히려 성서를 외면하는 것은 아닌가. 사람들에게 밟히는 맛 잃은 소금이라면, 한국교회는 사회의 적폐다. 이런 적폐를 넘어서려면, 최소한 네 가지는 해결해야 할 선결조건이다. 첫째, 안보프레임 전사로서의 한국 교회상은 극복해야 한다. 둘째, 자본주의 전위대로서의 한국교회상은 극복해야 한다. 셋째, 한국교회의 잘못된 권위주의는 극복해야 한다. 넷째, 예수의 십자가 정신을 사회의 중심에서 실천으로 제시해야 한다.
I. 안보프레임 전사로서의 한국교회상은 극복해야
한국사회가 절벽사회로 변했는데 이에 대한 맞섬의 정신이 없다면, 한국교회는 예수를 세상의 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 정의의 관점에서 사회 적폐를 경고하고, 국민을 패거리 정치로 분열시키고, 심지어 약탈 사회를 주도하는 정치인들에게 경고하는 것은 크리스천의 중요한 착한 행실 중의 하나이며 때로는 십자가의 길(마 16장 24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교회 리더들이 사회의 근본 뿌리인 정의(justice)가 흔들이고, 거짓말이 난무하고, 약탈사회의 고위험을 직시하지 않고, 안보 선동에 휘말려드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믿지 않는 자의 선동에 이끌린 한국교회의 리더십이 하나의 예다. 2003년 어느 날 저녁, 종로 5가 기독교연합회관에 목사들이 모여든 강단에서 조갑제는 기독교인이 아니라면서 한 자연인이자 대한민국 국민으로 교회를 향해 성서적인 사명감을 충동했다는 김지방의 지적은 음미할 만하다.
그가 요약한 조갑제의 말은 이렇다.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공산주의는 기독교의 적이다. 현재 정권은 그런 공산주의와 결탁하고 있다. 공산주의와 맞서야 할 우파, 우익에게는 지금 힘이 없다. 정치적 힘도 없고 금전적인 힘도 없다. 교회에는 힘이 있다. 금전적인 힘도 있고, 수십만 명을 동원할 수 있는 정치적 능력도 있다. 교회가 나서서 나라를 구해야 한다.”(『정치하는 교회 투표하는 그리스도인』 116쪽). 조갑제가 어떤 성서의 근거로 적폐의 중심인 패거리 정치에 한국교회를 동원하고, 한국교회를 극우 진영의 들러리로 만들었을까.
한국사를 보자. 조선을 몰락시킨 것이 패거리 정치의 폐해 아닌가. 한기총은 공산주의의 심각성도 다루고 파당정치의 폐해를 경고해서 한국사회와 정치의 평형수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한기총은 극우파 조갑제를 연사로 초청한 이유가 어떤 성경의 원리에 기댄 것인지 한국교인들에게 설명해야 할 것이다. 당시 한기총의 미숙함은 한국교회를 자폐환자처럼 매카시즘(McCarthyism) 사회악의 도구로 만든 것이다.
매카시의 안보프레임은 역사상 소크라테스 재판에서도 나타난다. 31개 그리스 도시국가연합이 페르시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그리스 도시국가의 주도권은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서 벌어졌다. 이 전쟁은 펠로폰네소스 전쟁(431BC~404BC)이며 여기서 스파르타가 승리하고 전쟁에서 패한 아테네의 많은 시민들은 전 재산을 잃게 되며 자살을 하거나 망명을 한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인들 중에 소크라테스를 포함 3천명에게만 스파르타 시민권이 주어진다. 그러나 얼마 후 아테네는 해방된다. 해방의 조건은 친일파처럼 스파르타의 부역자 노릇한 아테네인들을 징계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부역자 척결은 인간사 아닌가. 아테네 지도부는 전쟁 패배의 원인을 논의한 후 소크라테스를 고발한다. 아테네인들이 신들의 거주지인 올림포스 신전을 중심으로 국민들을 결집했는데 소크라테스가 방해한 것이 죄목이다. 소크라테스가 안보프레임의 걸림돌이 된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청년들에게 다이몬, 즉 인간 내면의 소리 또는 양심의 소리를 일깨운 것이 문제였다. 청년들에게 안보가 가장 중요한 것이자 전부인데 그가 청년의 양심을 일깨워 사형언도를 받고 독배를 마셨다. 양심을 일깨운 것이 청년 타락이라는 안보 프레임은 소름 돋는 얘기다.
어느 시대나 권력자들의 음모론에는 반공 프레임이 있는 듯하다. 전쟁의 후유증이지만 소크라테스가 청년들에게 가르친 양심교육이 국익에 해가 된 셈이다. 인류 보편가치인 양심과 국가의 특수가치인 안보는 대립이 아니라 상호 보완관계인데 극우파는 이를 무시하고 안보가 전부인 듯하다. 당시 아테네 지도부의 시각이 한국의 극우 시각과 겹치는 부분이다. 국가의 핵심가치가 사회정의임에도 매카시즘과 같이 안보프레임으로만 사회를 본다면 이는 극우파의 시각이지 성서의 시각일 수 없다.
예를 들어, 대통령으로서 박근혜가 정의를 무시하고 헌법을 어겼다면, 이에 대한 책임을 진지하게 묻는 것이 기독교의 가치이다. 그가 이명박 대통령보다 덜 부패했다는 식의 발언이나, 심지어 작년 5월 제19대 대선에서 유력 대통령 후보가 차기 대통령이 된다면, 한국은 빨갱이 나라가 된다는 식의 근거 없는 무책임한 말을 한다면, 그는 무늬만 기독교 리더이거나 극우파일 것이다. 만일 그런 극우주의자가 소크라테스의 시대에 배심원이라면, 청년의 양심을 일깨운 소크라테스를 어떻게 판결할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안보 검증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어느 정부든 정의가 사회의 토대다. 국민이 박근혜에게 대통령직을 위임한 것은 헌법을 무시하거나 헌법위에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법의 테두리 내에서 행정 권한위임이다. 그러나 그는 온갖 헌법을 어겼다. 2017년 2월 23일 평택샬롬나비 시국토론회 <최순실국정농단과 민주주의의 회복>에서 박종운 변호사가 대통령으로서 박근혜가 어긴 헌법과 법률은 실로 엄청나다.
“국민주권주의(헌법 제1조) 및 대의민주주의(헌법 제67조 제1항), 법치국가원칙, 대통령의 헌법수호 및 헌법준수의무(헌법 제66조 제2항, 제69조), 직업공무원제도(헌법 제7조), 대통령에게 부여된 공무원 임면권(헌법 제78조), 평등원칙(헌법 제11조), 재산권 보장(헌법 제23조 제1항), 직업선택의 자유(헌법 제15조), 국가의 기본적 인권 보장 의무(헌법 제10조),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사적자치에 기초한 시장경제질서(헌법 제119조 제1항), 언론의 자유(헌법 제21조) 등 헌법 규정과 원칙에 위배하여 헌법질서의 본질적 내용을 훼손하거나 침해, 남용하였다. 또한 박근혜 대통령은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법률위반(뇌물)죄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 관한법률 제2조 제1항 제1호, 형법 제129조 제1항 또는 제130조),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형법 제123조), 강요죄(형법 제324조), 공무상비밀누설죄(형법 제127조) 등 각종 범죄를 저질러 법률의 규정에 위배하였다”고 박종운은 지적한다.
교회 리더들이 안보에는 목숨을 걸면서, 성서의 관심인 사회정의에는 무관심할까. 오늘의 상황에서 안보와 사회정의는 보완관계인데 극우파는 안보를 절대시한다. 그러나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는 안보가 아니라 사회정의 문제다. 대선 당시 태극기집회를 이끈 주도층은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면 한국을 북한에 받칠 인물로 인식하고 반 촛불집회로 이끌었다.
일부 영향력 있는 기독교 리더조차 안보프레임으로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의 실체를 드러내지 못하게 막기도 했다. 교회 리더들은 진영논리의 전선구축으로 교인들을 우매하게, 한국사회를 더욱 피폐화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계속)